[스페셜1]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5] - PPP에서 만난 한국 감독 ②
2003-10-17
글 : 문석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진 : 조석환

물기있고, 감정이 풍부한 사랑 이야기

허진호 감독의 <행복>(가제)

봄날이 간 뒤, 보리밭에서 웃음짓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2001년 개봉한 <봄날은 간다> 이후 2년 만에 새로운 프로젝트 <행복>(가제)을 들고 부산에 나타난 허진호 감독은 찰나의 행복 뒤에 잔인한 사랑의 붕괴과정을 담아냈던 전작의 고통을 말끔히 잊은 듯 보였다. 게다가 이제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말고 극적인 상황 속에서 나오는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다시 한번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징한 탐험을 시작할 태세였다.

“DVD 작업 때문에 와 <봄날은 간다>를 연달아 볼 기회가 생겼다. 문득 <봄날은 간다>가 참 건조하게 찍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카메라와 인물과의 물리적 위치뿐 아니라, 인물을 바라보는 심리적 거리 역시 너무 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어쩌면 나란 사람이 그 사이 많이 건조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엔 카메라도 좀더 가깝게, 감정의 표출도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다.” 일단 영화제쪽에 제출한 간단한 시놉시스는 있지만 “그저 한 남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삼각관계가 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버전이 나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거다”라며 구체적인 스토리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허진호 감독은, 하지만 <행복>이 그 어떤 자신의 영화보다 “물기있고, 감정이 풍부한 영화”가 될 것이란 것에 대해 확언한다.

시대가 강요하는 ‘쿨’이라는 단어 대신 ‘신파’에 더 매력을 느낀다는 이 ‘거꾸로 가는’ 감독의 세 번째 사랑은 유리창 너머로 안타깝게 안녕을 고하는 대신, 봄날이 간 뒤에 멍하니 뒷모습을 응시하는 대신, 사랑이 다가온 순간, 마음껏 투정하고, 마음껏 울고, 마음껏 사랑하는 그런 ‘촌스런 현명함’을 가지게 될 것 같다.

이런 영화? 인생을 자유롭게 사는 한 남자가 있다. 내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을 즐기는 남자에겐 동거하는 오랜 여자친구가 있다. 어느 날 남자의 몸에 이상이 생긴다. 남자는 요양원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산골에 둥지를 틀고 서로를 통해 치유되어가는 두 사람. 그러나 스스로 살아나갈 힘들이 생기자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을 위해 떠나간다. 다른 세상과 다른 관계들 속에 놓인 그들은 서서히 서로를 잊어가고 세월은 무심하게 흐른다. 그러던 어느 날 산골을 찾은 남자는 그곳에서 여자와 조우한다.

떠도는 짝사랑에 빠진가련한 영혼들

김인식 감독의 <짝사랑은 끈질기게…>

김인식 감독의 시나리오들은 현재 ‘해방 중’이다. 김혜수를 캐스팅한 두 번째 영화 <얼굴없는 미녀>의 촬영을 앞두고 한창 바쁜 그가 세 번째 프로젝트 <짝사랑은 끈질기게…>(Love virus)를 들고 부산을 찾은 데는 “오랜 기간 갇혀서 빛을 못 본 많은 시나리오들에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그러나 단순한 ‘조급증’이 아니라 ‘열정’에 의해 그는 어느 때보다 스피드하게 이들의 해방에 박차를 가할 태세였다.

“대부분 짝사랑에 빠지면 좌절하고 상처받고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치유되어 일상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그 사랑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만큼 극단적으로 따라붙는다. 이건 그런 끈길기고 격정적인 짝사랑에 대한 영화다.” 제목에서부터 이야기의 골격이 느껴지는 <짝사랑은 끈질기게…>는 짝사랑에 빠진 가련한 영혼들에 대한 연민의 ‘로드무비’다. 동시에 이 영화는 돈에 대한 진지한 사유이기도 하다. “돈을 쟁취하면 사랑을 쟁취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94년 마카오의 카지노에 갔을 때 바카라 판에 쌓여 있는 칩을 보며 “돈의 의미를 상실한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한 칩에 사실은 많은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서로의 등만 바라보는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구체적 사건을 형성하는 자재가 되었다. 또한 지난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대 한국의 경기가 끝나고 한쪽은 기뻐서 날뛰고, 한쪽은 땅에 주저앉아 우는 광경을 보면서 비주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결국 이 영화는 홍콩의 후텁지근한 열대도시와 한겨울의 서울이 주는 비주얼의 극명한 대조와 함께 각 도시가 가지는 전혀 다른 돈의 의미가 강렬한 테크노음악과 폭력적이고 히스테리컬한 편집리듬 속에 전개될 예정이다.

이런 영화? 장서는 현재를 짝사랑한다. 그러나 현재는 주노를 짝사랑한다. 현재와 장서 그리고 필성은 사채업자의 돈을 갚기 위해 사기극을 벌이지만 현재는 동료들을 신고하고 혼자 돈을 차지해 홍콩으로 떠난다. 마카오에서 돈을 탕진한 현재는 홍콩 빈민가로 흘러들어가 주노에게 비행기 티켓을 보낸다. 1년 뒤 출소한 장서는 주노를 폭행해 돈을 가져오든지 현재를 데리고 오라고 종용한다. 결국 돈을 위해 주노는 홍콩으로 향하지만 그곳의 삶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어그레시브 인라인에 미친 아이들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

정재은 감독은 4년 전 파리의 한 단편영화제에 갔다가 매력적인 광경을 만났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젊은 아이들이 복작거리는 도심의 거리와 골목을 질주하고 있었던 것. 그는 팍팍한 도시에서 발산되는 싱그러운 젊음에 매혹됐고, 이 풍경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 서랍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끝내고 공포영화를 준비하다가 엎어진 뒤 새 영화를 준비하는 도중,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4년 전의 기억은 최근의 인라인 스케이팅 붐과 결합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태풍태양>으로 이어졌다.

그가 이번에 다루려는 소재는 단순한 인라인 스케이팅이 아니다. 스케이트를 타고 쇠난간, 계단, 화단 등을 타고 뛰어넘는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과 여기에 미쳐 있는 아이들을 다루려는 것이다.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은 ‘X-스포츠’의 하나로 세계대회까지 열릴 정도로 보편화된 종목. “아주 짧은 순간에 집중력과 유연성, 균형감을 한꺼번에 발휘해야 하고 굉장히 위험한데도 원하는 기술을 성공시켰을 때의 쾌감을 위해 꽤 많은 젊은이들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정재은 감독이 “도시의 댄서이자 수련자들”인 어그레시브 스케이터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남자 사이의 ‘멘토’(mentor) 관계다. “초보 스케이터가 뛰어난 기량의 선배를 보고 흠모와 혐오의 양가적 감정을 갖는 과정을 그린다. 서로 잘 모르는 친구들이 관계를 도모하는 이야기다.” 그는 이들 스케이터의 관계에 주목하는 가운데, 무심한 도시에 현란한 리듬을 제공하는 스케이팅 장면을 감각적으로 선보일 생각이다.

그런데 그동안 고양이 같은 소녀들의 내밀한 일상과 내면을 아기자기하게 담아내기로 유명한 그가 과연 이 남자들의 빠르고 강한 세계를 잘 담아낼 수 있을까. “<고양이를 부탁해>는 소녀 성장사 삼부작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상원에 다닐 때 습작으로 액션영화를 여러 편 만들어봤다.” 이미 시나리오를 완성해놓은 상태이며, 여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내년 4월쯤 크랭크인할 계획이다.

이런 영화? 이제 막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터 그룹에 들어간 초보자 소요는 뛰어난 기량을 가진 모기를 흠모한다. 이들 그룹은 아시안 X게임이 벌어지는 말레이시아로 가기 위한 비용을 모으기 위해 분투하지만, 이어지는 사고로 서로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말레이시아행 또한 묘연해진다. 지루한 태풍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이들의 삶도 서서히 변화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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