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교습소’는 그림 같은 제목이다. 듣자마자 선명한 심상이 피어난다. 소녀들이 흰 새처럼 스커트를 퍼덕거리는 드가의 스케치도 스쳐간다. 하지만 변영주 감독은 신작 <발레 교습소>가 그런 만만한 상상에 맞아떨어지는 영화가 아닐 뿐만 아니라 나아가 “<빌리 엘리어트>를 예상하면 뒤통수를, <워터보이즈>를 생각하면 앞통수를 얻어맞는 영화”가 될 거라고 유쾌하게 예고한다.
만약 우리에게 ‘내가 어른이 된 날’이라고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하루가 있다면 <발레 교습소>는 그 특별한 하루에 관한 영화라고 감독은 말한다. 그 잊을 수 없는 하루는, 세상에서 당한 그릇된 폭력을 처음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날일 수도 있고 담배를 처음 피운 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우유부단하며 바람의 방향도 공기의 냄새도 그대로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쩐지 알게 된다.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영화 <발레 교습소>에서 그 하루는, 하루가 아니라 수능시험 직후 석달 동안의 벌판 같은 시간이다.
<밀애>를 완성한 홀가분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무렵 찾아든 조용한 자괴감과 씨름하고 있던 변영주 감독을 흔들어 깨운 것은 언제나처럼 영화동지 신혜은 PD였다. “키가 껑충한 여자아이가 찢어진 청바지에 낡은 스웨터를 입고 걸어가다 뒤를 돌아본다. 무심하면서도 단호하게 쏘아보는 그녀의 목에는 토슈즈가 걸려 있다”라고 모티브를 던진 신 PD는 결국 시나리오 작가까지 겸임했다. 왜 하필 발레냐는 질문에 감독은 “발레는 몸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의지대로 컨트롤하는 무용이다. 아무리 배워도 일상에서 쓸모가 없으며 성공과 실패가 인생의 성패와 무관하다”고 답한다. 작은 은유가 숨어 있는 셈이다. 또한 <발레 교습소>는 일종의 정면승부다. 성장영화는 항상 변영주 감독이 유보조건 없이 열광한 장르였고, 청춘은 그에게 아련한 추억이 아니라 현재를 버티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80년대를 떠올려도 한국전쟁을 생각해도 어김없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습은 스물 무렵의 젊은이다. 바람 속에서 아프지만 그래도 걸어가겠다고 발을 떼어놓는 청년들이다. 그래서 내겐 80년대 최고 영화가 <만다라>가 아니라 <꼴찌에서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이다.”
캐스팅에 관한 한 변영주 감독은 거리낌없이 행운을 자축한다. <버스, 정류장>의 김민정과 그룹 GOD의 윤계상은 아무 제약없이 책상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던 구상단계부터 모델로 맴돌던 얼굴이었다. 윤계상은 사내아이와 사나이의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에 매료됐고, 너무 깜찍하고 예뻐서 작은 일그러짐도 큰 울림을 만들어낼 김민정에게는 그간의 어른스런 연기 대신 열아홉 나이로 직진하는 연기를 주문할 계획이다. “얘들아, 힘내!” 2월 중순부터 배우들 앞에서 고함치기 시작할 변영주 감독은 같은 응원이 세상의 모든 열아홉에게 전해지기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