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한국영화 야심만만 프로젝트 10 [8]
2004-02-06
글 : 김혜리
사진 : 이혜정
남선호 <영화감독이 되는 법>

“이 영화에 나타나는 실존 인물과의 관련은 순전히 우연이 아님을 밝힙니다.”

신인감독 남선호의 입봉작 <영화감독이 되는 법>의 서두에는 이런 자막이 흘러야 할 판국이다. 1990년대 초까지 극단 한강에 몸담았다가, 러시아 모스크바 영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남선호 감독은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또 지웠다. 지난해 심리스릴러의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던 그에게 “네가 살아온 이야기를 써보는 것이 제일 재미있지 않겠냐?”고 제안한 사람은 민문연 시절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영화사 마술피리의 오기민 PD였다.

자기 경험에 밀착한 영화가 남선호 감독에게 처음은 아니다. 영화학교 졸업 작품으로 그가 제출한 단편 <기억>은 민중운동을 하다가 먼 나라로 떠나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옮김으로써 기억의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영화감독으로 입봉하기까지의 울적한 체험을 장편 시나리오로 써보라는 오 PD의 제안에 남선호 감독은 반신반의했다. 내가 무슨 대가도 아니고 누가 관심이나 가질 것인가? 배우보다 감독이 좋은 점이 사람의 됨됨이를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작품을 꾸며내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 꼭 그래야만 할까?

그러나 마치 <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만처럼, 대책없는 감독 지망생과 그의 고단한 아내 이야기를 밀린 일기나 반성문을 쓰듯 써내려가던 남선호 감독은 지난해 10월 마침내, 그가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보다 그들의 (아마도 역시 고단했을) 가족이 감동받을 법한 영화의 초고를 완성했다. 얼핏 처량할 듯한 영화 <영화감독이 되는 법>은 구석구석 웃음이 흐르는 코미디다. “우리에겐 정말 힘겹고 답답한 내 사정을 남에게 이야기할 때는 슬쩍 희화화해 털어놓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감독은 설명한다.

현재 신인 정서경 작가와 함께 퇴고 중인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기약없는 입봉을 준비 중인 감독 지망생 상훈. 아내 민경은 상훈을 만나 무용수의 꿈을 포기하고 학원을 차려 남편을 영화 유학까지 보냈건만 아들 병국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도록 상훈은 무위도식한다. 민경을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상훈이 기회를 바지런히 찾아다니지도 않는다는 점. 기껏 만든 단편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일 하라고 다그치면 선배의 출판사를 찾아가 <꿈은 이루어진다 101가지> 실용서 시리즈 중 <영화감독이 되는 법> 편을 쓰는 일감을 받아오는 것이 고작이다.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가사분담을 입에 올리면서도 실제로는 “빨래 좀 개줘” 하면, 빨래를 강아지에게 던지는 어느 CF를 방불케 한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는 법>은 충무로 현실을 비판하는 영화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캐릭터에 기댄 홈드라마다. 상훈이 잘 풀리지 않는 주된 이유는 한국 영화계의 모순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습성에 있다. “감독을 지망하는 남자의 다수가 생계를 아내에게 의존하며 중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또 지식인이라는 많은 한국 남자들이 비판에는 능숙하지만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해결책을 찾는 데에는 무능하고 게으르다”라고 감독은 자성과 관찰로 빚은 상훈의 캐릭터를 소개한다. 이쯤 되면 <영화감독이 되는 법>이 연상시키는 영화는 <불후의 명작>에서 정지우 감독의 단편 <생강>으로 넘어간다. 캐스팅에서는 상훈과 민경이 부부로서 갖는 한 덩어리의 이미지를 우선 고려할 작정. 예정대로 프로덕션이 진행되면 남선호 감독은 올해 안에 처갓집 식구를 위시한 관객의 엄격한 첫 심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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