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타이틀]
박창선의 애니산책 <스팀보이 메모리얼 박스>
2005-06-07
글 : 박창선
막강한 부록들로 무장한 최신 재패니메이션

<아키라>라는 작품으로 대표되는 ‘오토모 카츠히로’라는 이름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재패니메이션이라는 단어를 전 세계에 유행시킨 그가 최신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스팀보이>로 오랜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유명세에 비해 솔직히 그가 제작에 참가한 작품치고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친 작품은 드물다. <메모리즈>를 비롯해 다른 작품들 역시 실험 애니메이션의 성격이 강해, 마니아 계층의 환영은 받았지만 정작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일반 애니메이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다. 오토모 카츠히로와 재미라... 뭔가 어색한 조합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재미보다는 화려한 영상과 난이도 높은 스토리 등으로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그가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97년부터 서서히 공개되기 시작한 각종 예고편들은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서서히 크게 만들어 갔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 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최신작 어쩌고 하는 거창한 카피 문구보다는 한 소년이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영국에서 겪는 모험 활극이라는 말이 더 와 닿았던 것이다.

실제로 스토리 또한 흥미를 끌만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온 가족이 발명을 좋아하고 언제나 독창적인 발명품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스팀 가문의 레이는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서 수수께끼의 금속 구체를 받게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지키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수상한 사내들의 손길을 피해 도망을 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금속 구체는 초고압력의 증기를 고밀도로 압축한 ‘스팀볼’이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암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이 스토리는 작품이 표방하고 있는 모험 활극과 잘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오랜 기간을 들여 완성한 작품답게 화려한 영상이 어우러지며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스팀보이>의 약점은 바로 그 스토리 전개에서 드러난다. 뭔가 보여줄 듯한 장면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느슨하게 풀어지는 경향이 있어 김이 빠진다. 그리고 각 캐릭터 간의 갈등은 있지만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과학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말 역시 그저 사탕발린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뚜렷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적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결국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스토리의 안정감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권선징악의 간결한 스토리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보는 이를 혼란 속에 빠뜨리는 꼴이 되었다고 할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반면 DVD의 품질은 우수하다. 126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고른 화질을 볼 수 있으며,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아날로그의 향취를 느낄 수 있도록 적당한 효과도 가미되어 있다. 채도가 낮은 관계로 화면이 탁하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뛰어난 작화 수준과 세밀한 배경묘사로 커버하고 있다. 돌비 디지털 5.1채널로 녹음된 음향 역시 만족스럽다. 모험 활극답게 사운드 분리 효과 좋아 레이가 하늘을 나는 장면이나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소리 등이 사실감 있게 들린다.

<스팀보이> 메모리얼 DVD 박스의 또 다른 장점은 바로 부록 디스크들이다. 무려 3장이나 들어있는데 ‘아카이브즈’, ‘메이킹’, ‘사운드’로 구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 꼭 봐야할 것은 ‘메이킹’이다. 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인터뷰와 10년의 제작 기간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각 스탭들의 이야기를 총괄적으로 들을 수 있는 보물급 디스크이다.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수정을 가하고 애니메이션 특유의 오버 액션을 억제하면서 사실감을 더하는 작업 과정이 자세히 들어있다. 무엇보다 ‘증기’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반복하며 최상의 효과를 만들어낸 과정이 재미있다.

오토모 카츠히로 감독
<메이킹> 디스크 중 콘티 사진
음악 녹음 현장
효과음 제작 과정

그리고 ‘사운드’ 디스크에서는 <스팀보이>의 사운드에 대한 모든 비밀이 들어 있다. 이 디스크를 보면 아마 당신도 음향감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백 가지의 사운드가 최종적으로 5.1 채널로 정리되는 과정이나 소리만으로 하나의 장면이 얼마나 다른 느낌을 주는지 잘 알려주는 디스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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