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 휘날리고 눈동자를 크게 뜨면~’으로 시작하는 김국환의 만화 주제가로 유명한 <신죽취물어 1000년 여왕(이하 천년여왕)>은 <은하철도999>, <우주해적 캡틴 하록>등 장대한 스페이스 판타지 애니메이션의 명인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이다. 국내 방영 당시의 인기는 <은하철도999>에 필적할 정도였는데 어린이보다는 당시 중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더욱 인기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1999년 9월 9일 9시 9분 9초에 1000년 주기로 공전하고 있던 혜성 라메탈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세기말적인 스토리로 큰 관심을 모았는데, 무엇보다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 팬들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마츠모토 레이지의 독특한 세계관에 있다. 모든 작품이 하나의 큰 줄기에서 파생된 듯 각각의 캐릭터가 서로 다른 작품에 등장하며 도움을 주는 범상치 않는 세계관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한 때 수많은 남성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은하철도999>의 메텔과 <천년여왕>의 야요이(천년여왕)와의 관계는 마츠모토 레이지 세계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천년여왕>의 마지막 장면에서 야요이가 메텔의 어머니인 프로메슘과 혈연관계에 있음을 시사하면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타당한 근거들을 제시하며 메텔과 야요이가 동일 인물이라는 설에서부터 자매라는 설까지 다양한 의견을 내놓으며 격론을 벌였다. 그 중에서 마츠모토 레이지가 직접 밝힌 것으로 알려진 동일 인물설이 최근까지 정설로 생각되어 왔는데 희한하게도 원작자 자신이 최근작 <메텔 레전드>에서 모든 가설을 뒤집어 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밝히지 않겠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좀 어이없다는 느낌이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스토리를 끼워 맞추다보니 결국 스스로 한계에 달한 것일까? 때로는 그냥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편이 좋은데 아쉽다.
이런 세계관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어디까지나 마니아들의 영역이고 <천년여왕>이 국내에서 인기를 누린 이유는 복잡한 스토리에 있다. 어린이들이 주로 시청을 많이 하는 시간에 방영이 되었지만 어린이가 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일단 등장하는 캐릭터의 수가 보통 작품들과 다르게 많았고 여러 가지 미스터리가 연이어 등장하는 등,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스토리 전개에 흠뻑 빠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직격탄을 맞게 된다. 난데없이 SF 애니메이션 방영금지가 결정돼버린 것이다. 당시 대통령 부인이 안 좋은 말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후문이 있었는데 정확한 사실 관계는 불명이다. 덕분에 ‘신난다! 재미난다! 어린이 명작동화~’를 몇 년 동안 계속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리기도 했지만, 그 당시는 SF 애니메이션의 암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에서야 이렇게 거금을 투자해 DVD를 구입, 전편을 다시 감상하게 되었는데 그 때만큼의 긴장과 몰입도는 느끼지 못했지만 80년대 초에 이런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위대한 상상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토에이에서 발매된 DVD는 품질이 그렇게 우수하지는 못 하다. 일단 일본이라고 해도 이런 장편 시리즈의 DVD 판매고는 그리 높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한 장에 7편을 넣었는데 그 결과는 퀄리티 저하로 나타난다. 전반적으로 화질이 상당히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강하다. 화면 밝기를 살짝 올려주면 그럭저럭 감상하는데 무리는 없으나 매번 조정을 해줘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다. 돌비 디지털 모노로 되어있는 음질 역시 좋은 편은 아니다. 상당히 사운드가 작기 때문에 볼륨 조절을 잘 해야 한다. 물론 그만큼 잡음의 압박에 시달린다는 것 또한 괴롭다. 더욱 아쉬운 것은 부가영상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논 크레딧 오프닝, 엔딩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포토 갤러리’의 한 개로 전부 커버하고 있다. 대신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천년여왕의 TV 시리즈 및 극장판 O.S.T CD를 보너스로 제공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다.
참고로 제목에 붙어있는 <신죽취물어>는 천년여왕의 원전인 일본 설화 ‘죽취물어 카구야 히메’에서 따왔다. 마츠모토 레이지가 새롭게 창조하며 앞에 ‘신(新)’이 붙은 것이다. 이 설화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으로 최근 애니메이션 중에는 <이누야샤 두 번째 극장판 거울 속의 몽환성>이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