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편집의 마술 [1]
2006-06-08
글 : 이종도

나는 수술대요 재봉틀이다. 내 위에서 영화는 사지가 꿰맞춰지고 이음매없이 매끄럽게 연결된 뒤 마침내 숨결을 얻는다. 예전 내 주인들은 무비올라니 스탠백이니 하는 내 선조의 몸 위에서, 손으로 일일이 필름을 확인하고 자르고 붙이는 중노동을 했다. 이제 주인들은 한결 편해져 자판 한번, 마우스 한번 옮기는 것으로 가위질과 바느질, 순서 바꾸기, 속도 조절, 화면 전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장에서 영화를 찍은 필름과 필름을 텔레시네하여 비디오테이프로 옮긴 것이 편집실에 오면 나와 내 주인의 일과가 시작된다. 그날 찍은 것을 보내오는 현장이 있고 며칠분의 촬영치를 묶어서 보내오는 곳도 있다. 비디오테이프를 컴퓨터 하드디스크로 옮겨 입력시킨 뒤 OK 컷만으로 영화 순서를 이어붙이는 순서편집은 편집의 초벌구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촬영이 다 끝나고 수십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쌓이면 본격적인 편집이 시작된다. 내 앞으로 감독과 현장의 모든 걸 기록하는 스크립터와 편집기사가 옹기종기 모여 순서 편집본에서 110여분의 상영시간을 넘어서는 분량을 쳐내는 작업부터 한다. 편집이 끝난 뒤 편집된 순서대로 원판 필름을 잘라 현상소에 보내는 것으로 편집의 모든 과정이 끝난다.

마틴 스코시즈가 3개월, 쿠엔틴 타란티노가 8개월을 내 곁에서 산다지만, 보통 제작자들은 내 앞에서 3주 이상 감독과 편집기사가 진치고 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다. 월터 마치 같은 전설적인 기사는 영화 캐릭터의 복장을 입고 오지 않는 한 배우를 들여놓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끔 배우가 편집기사에게 자기 분량을 늘리기를 요구하기도 하고, 그래서 편집기사가 8kg씩 몸무게가 빠지는 사태도 벌어지며, 제작자가 나타나 삭제를 요구하는 바람에 감독이 위경련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자존심 강한 나의 주인님들은 자율적인 편집기사의 리듬 감각을 존중받고 싶어하지만, 가끔 편집기사가 무시된 채 제작자나 감독의 의향대로 자판만 치는 오퍼레이터가 되기도 한다. 그때 주인님들의 시무룩한 입술이란.

그런데 편집이란 게 촬영된 필름의 순서를 배열하는 일만은 아니다. 푸도프킨의 스승인 쿨레쇼프가 실험한 걸 예로 들어보겠다.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 클로즈업에 각각 수프가 담긴 접시, 여자의 시체가 담긴 관, 뛰노는 어린 소녀를 연결해보면 이상한 효과가 발생한다. 배고픔, 깊은 슬픔, 아버지가 느끼는 긍지의 정서가 차례로 느껴진다. 배우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는데 말이다. ‘무엇을 어디에다 연결할 것이냐’가 바로 나의 과제인 바, 나로 인해 이런 예기치 않은 드라마와 정서의 리듬이 창조된다. 나는 수백만년 떨어진 시간을 이어주기도 한다. 유인원이 던진 뼈다귀 다음 장면에 우주선을 놓으면, 인간의 도구의 역사를 단 두컷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는 또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이기도 하고 압축시키기도 한다. <분노의 주먹>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슬로모션과 빠른 교차편집으로 실제 상대 복서에게 맞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게 얻어터진다. 영화는 내 위에서 자기만의 리듬과 자기만의 시간 배열을 얻은 뒤에야 온전한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숀 펜의 말대로 편집은 감독을 자살로부터 구해내는 성모 마리아인 것이다. 오늘도 내 주인님들은 타란티노의 말대로 ‘한 프레임 차이로 쓰레기가 되느냐 오르가슴이 되느냐’의 문제에 목을 맨다. 그러나 주인님들은, 그때 ‘거기에 없는 사람’이다. <라스트 타이쿤>에서 상영 중에 죽어가면서도 상영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편집기사 에디처럼. 내 소개가 늦었다. 나는 컴퓨터 영화 편집 프로그램으로 아비드, 파이널 컷 프로, 프리미어 등등으로 불린다. 내가 모시는 열분의 기사들과 내가 함께 만든 빛나는 창조의 순간을 소개할까 한다. 오늘 나를 만난 순간부터 당신이 보는 모든 영화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참고자료 <영화 이해의 길잡이> <영화의 이해> <영화후반작업>, DVD <커팅 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