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인정하는 바지만 김윤철 감독은 여성의 내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를 대표하는 두편의 드라마가 이를 입증한다. 미니시리즈 <내 이름은 김삼순>과 몬테카를로 TV 페스티벌에서 골드 님프상을 받은 단막극 <늪>에서 김윤철 감독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에서 아기자기한 사랑이나 섬뜩한 질투와 복수심을 끄집어내 보여줬다. 그가 데뷔작으로 <블루 혹은 블루>(가제)를 선택한 것 또한 여자주인공 캐릭터 때문이다. 원작에 해당하는 일본 작가 야마모토 후미오의 소설 <블루 혹은 블루>(대교베텔스만 펴냄)는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성을 만난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돈 많은 남편과 사랑없는 삶을 영위하던 주인공은 그녀가 과거에 사귀다 헤어진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을 알게 되고, 한달 동안만 자리를 바꿔서 살아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 남자가 폭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하지만 또 다른 그녀는 버티고 그 자리를 내놓지 않는다. “자신과 똑같은 그녀를 분신(分身) 같은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마음속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죠. 뒤집어 생각하면 그녀는 내 바깥에 있는 또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이에요. 결국 그런 복합적인 내면과 욕망을 가진 여성 캐릭터에 끌린 거죠.” 경상도 사투리가 살짝 섞인 나직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그에 따르면 결국 <블루 혹은 블루>도 그의 대표작들처럼 여성의 은밀한 욕망에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여성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은 무엇일까. “소설을 처음 볼 때는 지금 갖지 못하는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표면적으로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중요한 건 잃어버린 시간 같은데요. 지나간 시간. 지금 갖고 있지만 완전히 소유하지는 못한 시간. 그것을 되찾으려는 욕망 아닐까요.”
현재 시나리오 막바지 작업 중이라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소설과는 꽤 다른 방향으로 갈 것 같다는 김윤철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사가 내건 두 가지 원칙, 그러니까 상업영화라는 범주와 스릴러라는 장르에 맞춰서 풀어낼 생각이다. 두 여자의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는 소설과 달리 주체가 되는 한 여성의 시점으로 일관되게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것이나 결혼 등 여성을 둘러싼 제도에 관한 문제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장르적인 컨벤션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스릴러적인 요소에 최대한 리얼리티를 불어넣을 작정이다.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두명의 남자, 그리고 한 사람이기도 한 두 여자를 지금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로 바꾸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르적 변주와 관련해 그는 또 하나의 구상을 갖고 있다.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한 배경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일반적인 스릴러와 달리, 그는 이 영화의 주요 사건을 대낮에 벌어지게 만들어 일상성을 보탤 생각이다.
이 영화를 실현하는 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배우다. 특히 주인공과 그녀를 똑 닮은 여성을 함께 연기할 여성 연기자를 찾는 일이야말로 이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는 데 결정적 요체라 할 수 있다. 1인2역을 소화해야 할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차분했던 김윤철 감독의 목소리가 약간 격앙된다. “시나리오를 아직 끝내지 못해서 그런지 그런 배우가 드물어서 그런지, 지금으로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어요. 어쨌건 감정의 진폭이랄까, 욕망의 진폭이랄까 하는 것이 아주 큰 배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 진폭이 우리의 상상보다도 컸으면 해요. 혹시 누구 추천 좀….”
인터뷰를 마무리지으려니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첫째, 그는 왜 여성의 내면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남자들의 패거리 짓기나 서열 매기기는 몹시 싫고 체질적으로 안 맞았어요.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여성들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거든요. 그래선지 여성과는 나이를 불문하고 소통하기가 훨씬 편하고 쉬워요. 그런 것이 내가 여성에게 매혹되고 그들의 내면을 연구하게끔 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그럼 두 번째. 너무 친하게 지냈던 여성에게 자신의 자리를 침식당한 한 여성의 복수극 <늪>은 분명 스릴러적인 드라마였지만, <짝> <내 이름은 김삼순> <케세라세라>처럼 로맨틱코미디 요소가 강한 드라마를 잘 만들었던 그가 왜 영화 데뷔작으로 로맨틱코미디를 택하지 않았던 걸까.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로맨틱코미디는 잘 못하는데 작가와 배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거죠. 그리고 저 굉장히 진지한 사람이에요. 음, <케세라세라>는 꽤 진지했는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반성해야겠군. (웃음)”
나 이거 처음이야
김윤철 감독에게 <블루 혹은 블루>(가제)는 뭐니뭐니해도 첫 영화라는 의미를 갖는다. “남들은 내가 미니시리즈 몇개 성공하고 영화 만든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 나름으론 꽤 오랫동안 영화를 준비했다”고 그는 말한다. 1991년에 MBC에 입사한 그는 96년 <짝>으로 입봉한 뒤 99년부터 <베스트 극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쯤 그는 방송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휴직한 뒤 미국 칼아츠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사람들은 TV드라마와 영화를 사촌쯤으로 생각하는데 내 결론은 굉장히 먼 친척이라는 것이다.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이는 영화는 관객의 몸으로 다가가는데 TV는 그게 불가능하다. 게다가 TV는 ‘토 헤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클로즈업을 주로 사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첫 영화를 통해서 배우의 몸과 공간과 그 공간의 아우라를 담아내면서 자신의 갇힌 욕구를 풀어낼 생각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본질은 인물의 욕망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블루 혹은 블루>를 통해 캐릭터의 욕망뿐 아니라 배우의 욕망까지 고스란히 담아낼 포부를 품고 있다. 물론 순발력과 배우, 그리고 연기에 대한 이해력처럼 방송에서 익힌 노하우는 비장의 무기가 될 것이다.
시놉시스
부유하지만 무료함에 빠져 있던 여성 수민은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자신과 똑같은 외모의 한 여자를 보게 된다. 놀라운 점은 그뿐이 아니다. 그 여성은 수민의 옛 남자인 하영과 결혼한 사이였던 것. 자신과 똑같이 생긴 그녀의 존재를 궁금해하던 수민은 한달만 서로 바꿔 살아보자고 제안한다. 거기엔 하영을 향한 그리움도 한몫했다. 낯설지만 바뀐 일상에 행복해하던 수민은 옛 남자 하영의 숨겨진 폭력성을 알게 되고 자신의 삶을 원상복귀하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그녀는 수민의 인생을 돌려주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존재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는 수민은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사투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