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8 한국영화 신작] 이재용 감독의 <귀향>
2008-01-10
글 : 문석
사진 : 이혜정
어릴 적 꿈을 찾아 삼만리

이재용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트렌드’ 또는 ‘패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한 여성의 불륜을 세련된 영상 안에 담아냈던 <정사>,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현대적 감각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인터넷 만화를 바탕으로 청소년의 삶을 아나키즘적으로 묘사한 <다세포 소녀> 등 그의 영화는 시대의 흐름을 이끌어(내려 해)왔다. 하지만 그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귀향>은 뭔가 다르다. 한 실향민 노인의 이야기라니, 게다가 그가 금강산 관광을 갔다가 고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니, ‘역 트렌드’쯤 되는 건가.

이재용 감독은 <귀향>을 <다세포 소녀> 촬영을 끝낼 무렵 떠올렸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한 사람이 죽음이 가까웠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말년을 어떻게 준비할까 같은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부모님이 연로해가시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리고 나 자신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은 ‘노년이 되면 자신의 근본이나 어릴 적 꿈으로 돌아가고 싶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연결됐고, 실향민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야기로 발전해나갔다. <귀향>은 결국 살아가면서 꿈을 하나씩 접어가던 한 노인이 뒤늦게나마 어릴 적 꿈과 재회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리는 영화다.

이 영화의 주요한 공간은 노인의 복덕방과 살림집이 자리한 이태원이다. 이재용 감독은 이태원에서의 로케이션을 전체 분량의 60% 정도로 생각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배경을 이태원으로 설정하는 것은 굉장히 우연히 이뤄졌는데 막상 설정하고 보니까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인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너무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배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붙여졌다는 게 정설이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치욕을 당한 여승들과 부녀자들을 정착시켰다는 의미에서 이태원(異態園)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 또한 존재할 정도로 이태원은 우리 안의 다른 문화를 상징해왔다. 일제시대에 일본군 사령부가, 해방 뒤 미군이 주둔하면서 더욱 고착된 이 같은 인상 때문에 이태원은 한때 방종한 공간으로 받아들이지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그곳을 욕망하면서도 동시에 멸시하는 이중성을 보여왔다. 그것은 분명 편견이다. 이제 이태원을 다문화사회의 하나의 표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는 이재용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태원을 우리의 생활의 터전으로서 보여줄 작정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고향’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일 듯하다. 마음속 고향을 잃어가고 있는 노인, 물리적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국인 노동자와 불법 체류자, 주한미군, 그리고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정체성이라는 ‘고향’을 빼앗긴 트랜스젠더까지, 이 영화는 사회적인 편견과 소외 속에 놓인 이태원의 사람들을 비추게 된다.

그런데 대체 한 노인이 이태원의 복덕방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다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금강산에 갔다가 내려오다 고향으로 향하는 내용이라니, 이게 과연 상업영화 맞는 걸까. 혹시 너무 무거운 예술영화가 되는 건 아닐까. “그것 또한 편견에 사로잡힌 생각”이라고 이재용 감독은 설명한다. “우선 나 스스로 무거운 것을 별로 안 좋아하고, 노인들의 삶이라 해도 분명 여전히 철이 없을 것이고, 그들 나름의 재미있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편하고 소소하게 재미있으면서도 보다 보면 나름 큰 감동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영화의 내용상 굳이 비주얼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은 못 보고 지나가는 소소한 데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이기에 5월의 푸른 금강산 풍경 등 <귀향>은 이재용 감독 영화 특유의 시각적 쾌감을 전할 전망이다. 어쨌거나 “그동안의 영화보다 좀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 그동안 느꼈던 소소한 것들이 많이 농축돼있고, 그동안 했던 어떤 영화보다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재용 감독이 <귀향>에 갖는 기대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것보다 훨씬 큰 듯하다.

이 노인 역할을 맡을 배우에 대해 ‘연기력, 건강함, 그리고 할머니 관객을 위한 섹시함(?)’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있는 이재용 감독은 이 영화를 3월경 촬영에 들어가 8주 안에 마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족영화뿐 아니라 섹스영화, 시사적인 영화, 다큐멘터리, “<다세포 소녀>보다 말도 안 되게 더 나아간 영화” 등 너무나 관심이 가는 영화가 많다는 그는 <귀향> 이후 태종 때 일본의 선물로 조선에 들어온 코끼리에 관한 이야기를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쉽고 재밌는 영화”로 만들 예정이다.

나 이거 처음이야

이재용 감독이 <귀향>을 작업하면서 품은 야심 하나는 북한 로케이션이다. 이재용 감독은 이 노인과 친구들이 관광차 방문하는 금강산뿐 아니라 노인의 고향인 금강산 인근 통천으로 가는 길과 작은 마을, 하룻밤 묵어가는 집, 그리고 그가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소풍 갔던 명사십리 해수욕장 등을 북한 현지에서 실제로 촬영하고자 하는 것이다. “외국 사람이 다큐멘터리를 찍거나 사극에서 시도해봤지만 영화로는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기에 언젠가 꼭 가고 싶었고, 세계 어느 곳보다도 가깝지만 가장 알 수 없는 곳이라 그곳에서 촬영하는 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이재용 감독은 말한다. 하지만 현재로선 <귀향>이 북한에서 촬영할 수 있을지 단언할 수 없는 상태다. <귀향>의 류진옥 프로듀서는 “현대 아산을 공식 루트 삼아서 북한쪽과 접촉 중인데, 금강산 촬영이야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시골에서 촬영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라면서 “공식 루트뿐 아니라 비공식 루트를 통해서 촬영을 타진 중”이라고 말했다. 일이 잘 진행돼서 북녘의 산하를 시원한 스크린을 통해 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이재용 감독이나 제작사 관계자만이 아닐 것이다.

시놉시스

서울 이태원에서 복덕방을 운영하는 이 노인은 3개월 전 아내가 사망한 뒤부터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는 아내의 이름으로 된 처방전으로 수면제를 사모으는가 하면 뜬금없이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곤 하는 것. 게다가 딸의 결혼을 서두르고 복덕방 장부를 다른 이에게 넘기기까지 한다. 뭔가 은밀한 작업을 하는 듯하던 이 노인은 꿈에 그리던 금강산 여행을 떠난다. 원산이 고향인 그는 한국전쟁으로 15살 때 혈혈단신 월남해 자수성가한 인물. ‘세상의 모든 곳을 누비리라’던 어릴 적 꿈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는 감회에 젖은 눈으로 금강산을 둘러본다. 산을 내려오다 볼일이 급해 잠시 일행과 떨어진 이 노인은 일행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홀로 고향 마을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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