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실리 2km>를 끝내고 난 뒤 신정원 감독은 꽤 많은 코미디 시나리오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연출 의뢰를 모두 거절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어쨌든 웃기려고 작정한 시나리오들이었으나 전혀 웃기지가 않았다”. 미리 귀띔하자면 신정원 감독의 감성과 취향은 좀 유별나다. 그는 웃기는 영화들과 웃기지 않는 영화들로 가치를 매긴다. 홍상수,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건 그들의 영화들이 정말 웃겨서다. “그들의 영화에는 짜고 치는 게 없다. 진짜 자신들이 관찰한 세상이 들어 있고 그래서 웃기다.” 반면 “밥도 안 먹고 사명감 하나로 싸우는 영웅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블록버스터는 하나도 안 웃긴다. 그만의 웃긴다는 표현은 그러니까 코믹하다는 의미 이상이거나 완전히 다른 뜻이다. 어쨌든 남들이 못 웃기니 본인이 웃기는 수밖에 없다. 식인 멧돼지 이야기 <차우>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비뚤어진 상상력이 괜한 공상은 아니다. 왜 하필 돼지인가, 라고 했더니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겠지만 현재 한국의 생태계 구조상 육지의 가장 상위 포식자는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닌, 바로 돼지”라는 답이 돌아온다.
1년 전에 시나리오를 썼지만 <차우>를 함께 출산할 파트너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썼는데 정작 어떻게 영화화할지 미처 생각 못한” 탓도 있다. 살아 뛰는 식인 멧돼지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과거 뮤직비디오 작업 때부터 믿고 일했던 폴리곤 비주얼 웍스의 김두진 대표는 “국내 작업으로는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반지의 제왕> 동영상 게임을 제작하면서 할리우드 현지 기술스탭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김 대표는 이후 <에라곤>의 감독이자 <터미네이터2> <쥬라기 공원> <라이언 일병 구하기> <퍼펙트 스톰>에서 특수효과를 맡았던 스테판 팽마이어를 감독에게 소개시켜줬다. “처음에는 김 대표의 말을 안 믿었다. 설마 했는데 올해 5월에 있었던 내 결혼식에 청첩장도 안 보낸 팽마이어 감독이 왔더라. (웃음)” 인연은 꼬리를 물었고, 식인 멧돼지의 DNA 배양 작업도 조금씩 진척됐다. 팽마이어는 2003년까지 ILM에서 일했던 CG맨 한스 울리히, 그리고 <트랜스포머> <인디아나 존스4>의 애니메트로닉스와 특수촬영을 맡았던 커너 옵티컬을 소개했고, 지금은 이들 3인방을 중심으로 몸값이 7억∼8억원인 “흉포한 돼지로봇 제작”까지 끝낸 상태다. “처음 떠올린 돼지 모습은 <모노노케히메>에 나오는 산신령 같은 이미지였는데 더 사나운 모양이 됐다. 키는 2m쯤 되고, 길이는 3∼4m쯤 된다. 눈이랑 귀까지 움직이면 진짜 무섭다. 가장 큰 난점은 털이었다. <킹콩>만 봐도 가짜 같다. 하지만 그건 만화가 원작이니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차우>는 진짜 맷돼지여야 한다. 다행히 결과는 만족스럽다.”
<차우>는 인간들로 인해 오염된 생태계가 저주를 잉태하고, 결국 그로 인해 인간들이 공격받는 괴수영화의 틀을 유지한다. “<괴물>처럼 큰 이야기를 꺼낼 자신은 없다”는 신정원 감독은 “내 관심은 어렸을 때 보고 며칠씩 끙끙 앓았던 <죠스>와 <에이리언>과 <구니스>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초등학생 때 봤던 <십계>의 기억과도 연관있다. “정말 바다가 두쪽으로 갈라지는 줄 알고 놀라 자빠졌던” 그때처럼, <차우>의 식인 맷돼지는 눈앞에서 진짜로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기세를 보여줘야 한다. 현재 시나리오는 7고 작업까지 끝낸 상태. 아직 밝힐 수 없으나 배우 캐스팅 또한 거의 마무리됐다. 하지만 <시실리 2km>를 눈여겨본 관객이라면 <차우>가 평범한 공식의 괴수영화로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친 않을 것이다. 코믹호러라고 이름 붙은 <시실리 2km>는 코믹한 장면에서 무섭고, 오들거리는 장면에서 폭소가 터져나오는 요상한 영화였다. 게다가 감독은 정작 이 영화를 두고 “찌질한 인생들이 주인공”인 누아르라고 했다. “<시실리 2km>는 하고 싶은 것 중 30% 정도 한 거다. 마지막 장면도 애초에는 임창정이 신들려서 대로를 달리는 거였는데….” 그러니 제작기획서에 <차우>가 액션스릴러라고 쓰여 있어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클리셰를 파괴하는 재미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그의 전력을 감안하면, ‘씹는다’는 외에 ‘충청도 방언으로 덫이라는’ 뜻을 지닌 <차우>는 ‘닭살 돋는’ 괴수영화로 그칠 것 같진 않다.
나 이거 처음이야
<차우>의 영화 속 배경은 지리산 자락이지만, 정작 신정원 감독이 촬영지로 선택한 곳은 샌프란시스코다. 해외 촬영이 처음이라는 그는 헌팅 당시 사진을 보여주면서 “한국의 숲이랑 그닥 다르지 않은 느낌인데다 촬영지로 택한 곳이 <스타워즈> 시리즈를 비롯해 영화제작이 빈번히 이뤄졌던 곳이라 제반 환경이 월등하다”고 전한다. 이 촬영지는 미국쪽 특수효과 스탭들이 일러준 곳. “로봇이 고장나면 고치기도 어렵잖나. 또 한국은 수목원 같은 곳에서 영화 촬영 허락을 받기도 어렵고. 촬영이 가능하다고 해도 카메라 이동이나 조명 크레인을 설치하기 힘들고. 숲속 나무들의 키가 엄청 높은데 그림을 만드는 데도 유리할 것 같다.” 70% 촬영을 미국에서 진행할 제작진은 콘티가 완성되면 배우들과 함께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시실리 2km> 때는 서울의 모처에서 배우들과 합숙하며 리허설을 반복했는데 변희봉 선생님 패거리와 임창정씨 패거리가 실제로 사이가 안 좋을 만큼 효과가 있었다. <차우>는 그때만큼 시간이 많진 않지만 촬영지가 낯선 환경이니만큼 자연스럽게 배우들도 영화의 분위기를 익히지 않을까 싶다.”
시놉시스
지리산의 평화로운 마을 삼매리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참혹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오래전부터 삼매리에서 살아왔던 전문사냥꾼 천일만의 손녀가 머리만 남은 변사체로 발견되는 등 피해자가 속출하지만 경찰은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하고 수사는 전혀 진전이 없다. 한편 서울에서 교통경찰을 하다 삼매리 경찰서에 새로 부임한 김 순경은 사건담당인 신 형사와 함께 살인사건 수사에 나서게 되는데, 이들은 처참한 행패가 극악무도한 인간이 아닌 거대한 식인 멧돼지의 소행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의 유명 사냥꾼들이 지리산 자락으로 몰려들지만, 외려 식인 멧돼지의 무참한 역습을 자초하는 결과만 낳고, 급기야 김 순경의 치매 걸린 노모까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김 순경은 천일만, 신 형사, 그리고 현장에 끝까지 남았던 멧돼지 전문사냥꾼 백 포수, 동물생태연구원 수련 등과 함께 피비린내 진동하는 짐승의 족적을 찾아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