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의 탈영병과 쫓는 사냥꾼들의 이야기라니. 이송희일 감독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드디어 ‘군복 페티시’ 영화를 향한 개인적 열망이 터져나왔느냐고 농을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탈영’은 “소싯적에 그에 관련된 소설도 하나 썼을 만큼” 그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둔 소재였고, 마침내 때가 됐다고 느낀건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나오면서부터다. “이제는 군대 내부의 모순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사실 한해 장교만 100명 넘게 탈영한다. 사병은 더 많지 않을까.” 문제는 마침내 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탈영이라는 소재는 짐짓 낡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송희일 감독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70~80년대로 할까 고민을 거듭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자료조사를 하면서 그는 마음을 바꿨다. “군대와 엄마라니. 얼마나 신파적이고 구태의연한가 말이다. 하지만 21세기에도 탈영의 첫 번째 이유는 가정사다. 둘째는 애정문제, 셋째는 구타다. 이건 올드한 게 아니다.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재다.”
<사냥꾼의 밤>의 이야기에 구체적인 영감을 부여한 것은 러시아 감독 그레고리 추카라 감독의 <병사의 시>라는 영화다. 1959년작인 <병사의 시>는 어느 평범한 러시아 병사가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엄마에게 가는 길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송희일 감독이 끌린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끝난 60년대 러시아 수정주의 영화의 전통이 아니었다. 그저 “엄마를 찾아가는 군인 이야기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간단한 아이디어였다. 이탈리아 튜린 레즈비언-게이영화제에 초청된 이송희일 감독은 남는 시간에 잔디밭에 누워서 슥삭슥삭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귀국 길에 들른 두바이 공항에서는 심지어 어떤 징조 같은 걸 봤다. “신문을 펴자마자 탈영병 자살사건이 나왔다. 구타를 행한 선임자들의 이름을 쪽지에 적어서 주머니에 넣은 채로 자살했는데, 나를 화나게 한 건 시체를 발견한 구타병들이 쪽지를 몰래 빼돌렸다는 사실이었다. 실화의 힘이란 픽션보다도 훨씬 잔인하고 무섭다.”
<사냥꾼의 밤>은 그러나 실화의 힘에 기대어서 탈영병들의 가슴 아픈 집안사를 훑어내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이송희일 감독이 원하는 것은 “본격적인 장르영화”다. “군대장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회상? 그런 것도 없다. 탈영이 시작되면 땡! 거기서 시작해서 마구마구 달려간다. 쫓는 자들의 주관적 시점 또한 전혀 할애하지 않을 생각이다.” 독립영화계 신파물의 거성이라는 이름을 이제는 떨쳐버릴 때도 된 것일까. “사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신파 아닌가. 이 영화도 처음엔 신파멜로로 만들어볼까 싶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장르 라인을 한번 물려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그가 <사냥꾼의 밤>을 위해 참고한 장르영화는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와 로버트 알트먼의 <보위와 키치> 같은 전형적인 ‘도주하는 갱영화’다. 특히 그는 저예산영화이니만큼 “롱숏 위주로 대공황 시대의 사회적 공기를 잡아내고, 특별히 쫓는 자들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라디오와 TV를 이용해 긴박한 상황을 암시하는 알트먼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용해볼 생각이다. 덧붙여 이송희일 감독은 “장르와 이야기를 함께 가져가는 빠른 템포의 스릴러 문법”을 구사할 것이라 장담한다. 그가 언급하는 영화는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 “정치적으로는 아주 싫어하는 영화지만 산속 추적장면만은 대단하다. 스테디캠과 크레인 숏을 아주 정밀하게 계산해서 만들어낸 엄청난 장면들이다.” 물론 “미드 스타일의 대책없이 표백된 액션을 만들 생각은 없다”는 그의 첨언을 빠뜨려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이송희일은 이송희일이다. 본격적인 장르영화를 만들더라도 ‘모성’이라는 감정을 이용한 신파의 정서를 완전히 거둬낼 생각은 없다. 물론 모성을 치유제로 승화시키는 지난 한국영화들의 못난 신파극을 뒤따르려는 것은 아니다. “모성은 거의 추상적인 욕망, 그러니까 기의(記意)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다. 그걸 이용해서 남성성을 한번 더 건드려보자는 거다. 가부장제를 또 어떤 식으로 한번 괴롭혀볼까 싶기도 하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엄마를 소재로 해서 남자 관객도 좀 끌어들여보려고. (웃음)”
이송희일 감독은 이제 (스스로는 1.5고라고 부르는) 시나리오 2고를 탈고했고, 캐스팅과 프리 프로덕션이 끝나는 4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후회하지 않아>는 너무 조급한 나머지 시나리오도 2고에서 끝내고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첫 장편이었는데 호흡조절이 어설퍼서 지금도 너무 아쉽다”는 그는 <사냥꾼의 밤>만큼은 충분한 준비를 거쳐서 돌입할 것이라 장담한다. 이송희일은 후회없이 달릴 준비가 됐다.
이런 건 처음이야
사실 이송희일 감독은 <후회하지 않아>를 끝낸 직후 청년필름에서 정치스릴러를 준비 중이었다. 무려 5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상정한 일생일대의 대작이 될 작품이었다. 하지만 첫고를 끝낸 직후 그는 영화를 엎어버렸다. 한국 영화산업이 흔들리는 상황이라 주제가 강렬한 50억원짜리 영화는 투자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 “1억원으로 영화 만들던 사람이 갑자기 비싼 영화 만드는 거 좀 무리 아니겠나. 나는 싸고 빨리 찍는 게 장점인데. (웃음)” 하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사냥꾼의 밤>의 예산은 지금까지 이송희일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의 예산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을 예정이고, 독립영화라는 타이틀을 떼내고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배급 루트를 따를 생각도 있다. 스타급 배우의 캐스팅 여부는 “선댄스가 괴멸한 건 미국 인디영화계가 스타 시스템을 도입하면서부터”라고 믿는 열혈 인디감독의 가장 큰 고민이다. 하지만 이송희일은 이런 원칙 역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거란 암시를 슬그머니 남긴다.
시놉시스
무장한 세명의 군인이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다. 재훈과 민재와 동민. 계급도 고향도 다른 세명의 남자는 각자 다른 이유와 상처를 가슴에 안고 탈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군부대의 추격은 점점 그들을 코너에 몰아넣고, 막내 동민은 체력적인 한계로 계속해서 뒤처지기 시작한다. 완전히 지쳐버린 세 사람이 참호에 잠시 몸을 숨긴 어느 날. 동민은 자신을 구타한 선임병들의 이름이 적힌 노란 종이쪽지를 꺼내며 구타당한 순간의 분노를 되새기고, 이를 쳐다보는 민재는 쪽지에 혹여나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을까봐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지쳐버린 동민을 내버려두고 민재와 재훈은 따로 도주길에 오르는데. 그들은 과연 숨통을 조여오는 사냥꾼들로부터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