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8 한국영화 신작] 송일곤 감독의 <사화>(가제)
2008-01-10
글 : 문석
사진 : 이혜정
조선판 <대부>의 호러 버전

“너무 외로워서요.” 처음으로 본격 대중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를 답하면서 송일곤 감독은 유쾌한 웃음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농담이라는 뜻은 아닌 듯했다. “좀더 많은 대중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대중성이 있으면서도 힘있는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꽃섬> <거미숲> <깃> <마법사들> 등 예술영화적 지향이 명확하거나 대중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에 놓인 작품을 만들어온 송일곤 감독의 첫 상업영화는 <사화>(가제)다. 사화(士禍),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반대파에 몰려 화를 입은 사건을 모티브로 가져온 이 영화는 한 가족의 흥망을 그리는 호러영화다. 제작사에서 제시한 4개의 시나리오 중 그는 “비극적인 캐릭터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그리스 비극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작품을 덥썩 집어 들었다. <사화>의 주인공 박윤겸은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사화를 일으켰지만 이 과정에서 친동생마저 죽이게 된다. 큰아들 성호는 그런 냉혹한 아버지를 보면서 방황하고 며느리 자영은 양자로 받아들인 소훈을 통해 모성애를 느낀다. 머지않아 무시무시한 사건이 거듭 발생하고 이 세 사람은 혼돈으로 빠져들면서 거칠게 대립하게 된다. “박윤겸은 맥베스처럼 몹시 비극적인 인물이에요. 대의와 명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피를 보게 되니까요. 그게 참 매력적이죠.”

스릴러와 호러, 두 장르 모두 가능했던 이 이야기를 호러로 녹이게 된 것은 누가 범인인지, 또 무엇이 공포의 근원인지를 추리하게끔 하기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남편과 며느리의 갈등 등 영화 속 주인공들의 대립이 증폭되면서 개개인의 내적 공포를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그럼에도 <사화>는 호러영화치곤 특이한 노선을 택한다. 일반적인 호러영화에서라면 공포를 일으킨 시원을 플래시백 등의 기법으로 보여주면서 반전을 꾀하게 마련인데, <사화>는 “박윤겸이 일으킨 사화의 과정을 초반에 다 드러낸 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공포를 느끼면서 몰락해가는지에 주안점을 두는” 정공법의 내러티브를 택했다. “사람들이 왜 죽어나갈지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이 가문이 과연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사실 우리도 반전에 반전을 고민해봤는데 결국 확신을 갖고 정공법으로 밀어붙이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호러영화로서 <사화>가 특이한 또 다른 점은 귀신이나 령(靈)을 될 수 있는 한 등장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다. 대신 이 영화가 관객을 놀래기 위해 사용하게 될 가장 주요한 수단은 한옥이라는 공간이다. 한옥은 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기도 하고, 다락방이나 마루 아래의 공간이 있는 등 깊이가 있는 구조인데, 그 깊이 안에 깃든 어둠은 충분히 공포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포감을 자아내려고요. 낙선재, 수강재, 석복헌처럼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면 정말 아름다워요. 방바닥에 하얀색 한지가 깔려 있고 한지 창호로 빛이 스며들어 오묘하거든요. 그런데 빛이 없으면 음습한 느낌이 나죠.” 이러한 맥락에서 송일곤 감독은 <사화>는 화려한 색감을 덜어내고 수묵담채화의 톤으로 영상을 담아낼 계획이다. 결국 <사화>는 캐릭터와 서사라는 영화적 기본에 충실하면서 공간과 빛이 자아내는 은근한 공포를 통해 관객의 숨통을 지긋이, 그리고 서서히 조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호러영화다.

그런데 대체 송일곤 감독은 이 장르영화의 틀을 빌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 영화는 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가문과 당파를 지키기 위해 다른 가문의 9족을 멸하고 동생까지 죽이는 박윤겸처럼 아버지들은 목숨을 걸고 뭔가를 지키려 하는데, 과연 그 대의명분이나 이념이란 대체 무엇인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인지, 묻고 싶은 거죠.”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나니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 결국 혈육을 죽여야만 했던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가 떠오른다. “맞아요. 이건 <대부>의 호러 버전이라고 볼 수 있어요.” 코폴라가 <대부>를 통해 미국의 현대사를 미시적으로 해부했듯, 송일곤 감독 또한 이 영화를 통해 한국 현대사에 메스를 들이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권위를 내세워 가족을 통치한 아버지에 대항했던 아들이 아버지가 된 뒤에는 그를 닮아갔던 우리의 역사 말이다. “사극이라는 게 아무래도 현실을 상징화할 수 있고, 더욱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영화의 배경인 겨울 풍경을 담기 위해선 늦어도 3월에는 촬영을 시작해야 한다는 송일곤 감독은 한번도 카메라가 들어가지 못한 창덕궁 안의 건물들을 담아내고 싶다며 특유의 촉촉한 눈을 깜박였다.

나 이거 처음이야

송일곤 감독에게 <사화>(가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첫 영화’다. <사화>는 그가 처음으로 만드는 본격 상업영화이자 첫 호러영화이면서 첫 사극이기도 하며, 처음으로 30억원 넘는 예산으로 제작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관심이 가는 대목은 처음으로 접하는 상업영화 시스템을 그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점이다. “<꽃섬>은 오밀조밀한 수작업 같은 영화”였다는 송일곤 감독은 “이번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교회 천장에 큰 벽화를 그리는 것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개인적인 영화에서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졌다면 상업영화 시스템에서는 전체적인 컨셉만 잡고 실제 그림은 “여러 사람이 천장에 매달려 그린다”는 것이다. <꽃섬> 이후 줄곧 개인적인 작업에만 매달려왔던 터라 생경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는 “굉장히 즐겁다”고 말한다. 각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협업하는 것이 재미있단다. 그렇다고 그가 앞으로 그동안 해왔던 수작업을 포기할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두 종류의 영화를 병행해야 할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놉시스

10년 전 신씨 일가에게 몰려 가세가 몰락한 박윤겸 일가는 사화를 획책해 정권을 되찾는다. 박윤겸은 신씨 일가를 철저하게 도륙한 뒤 빼앗겼던 종택(宗宅)을 비롯한 가산을 되찾고, 둘째아들 성원에게서 손자 소훈까지 얻는 등 승승장구한다. 그로부터 7년 뒤 지방에 있던 성원의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소훈만이 살아남는 참극이 발생한다. 권력에 뒤따르는 피비린내가 싫어 관직에 오르지 않는 윤겸의 큰아들 성호와 처인 자영이 소훈을 양자로 들이면서 윤겸의 집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윤겸의 아버지 문성공을 모시던 몸종이 사라지더니 문성공마저 변사체로 발견된 것. 이제 윤겸과 성호, 자영 등은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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