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국내의 한 평론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심사위원들과 담소를 나눌 자리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한국 감독들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다고 합니다. 그러다 홍상수 감독이 화제에 올랐고 누군가가 홍상수 감독을 아느냐고 물어왔답니다.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밝혔더니 질문자는 몹시도 궁금하다는 뉘앙스로 불쑥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은 홍상수 감독과 소주라는 걸 마셔본 적이 있나요?” 그 일화를 전해주던 평론가는, 다른 것도 아닌 소주를 딱 집어 물은 것, 그게 참 재미있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의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해외의 평자였을 그 질문자는, 당신은홍상수 감독과 얼마나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요, 하고 더 캐묻는 대신, 당신은 홍상수 감독과 소주라는 걸 마셔보았나요, 하고 특정한 사물을 매개로 한 호기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뻔하게 교분과 친분의 깊이를 묻는 대신 특정 사물을 공유해본 경험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소주라는 사물이 관계에 미치는 중요성을 의식한 것입니다. 홍상수의 영화를 떠올릴 때, 감독 홍상수를 떠올릴 때, 질문자에게는 소주라는 사물이 저절로 같이 떠올랐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그 질문자는 홍상수 영화의 오랜 관객이었을 겁니다. 소주가 그의 영화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 특별한 사물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영화의 조류를 대변하기도 했던…
그 외국 평자의 질문을 사소하거나 순진하거나 유치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는지요. 그와 같은 상상의 질문들은 그 얼마나 많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인지요. 또한 그 질문들은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요. 그럼 당신은 장 뤽 고다르와 함께 마오쩌둥에 관한 책을 읽으며 토론해본 적이 있나요. 그럼 당신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가며 창 밖의 풍경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나요. 그럼 당신은 짐 자무시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나눠 피우며 토킹헤즈의 음악을 함께 들어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고다르의 영화에서 책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자동차가, 자무시의 영화에서 커피와 담배가 중요한 사물이며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필시 어떤 감독들은 어떤 사물을 자신의 영화의 가장 중요한 배우에 버금갈 정도로 기용하곤 합니다. 그때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이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 사물이 그 영화에 없었다면, 이라고 가정할 때 도저히 성립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영화들이란 얼마나 많습니까.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자전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도대체 어떤 영화가 되었을까요. 전쟁 직후와 실직이라는 최악의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꼭 필요했던 자전거를 잃고 도심을 헤매다니는 한 하층민 남자의 가슴 아픈 모습을 그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지요. 빛나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나오기 이전, 이탈리아 영화의 속물적 경향을 조롱하기 위해 나왔던 용어는 무엇이었습니까. 영화 속 대저택의 실내 장식 중 하나로 하얗고 하얀 고급 전화기가 툭하면 등장한다고 해서, ‘백색전화 영화’라고 그 시기의 영화들을 야유하며 부르지 않았던가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영화의 사물 하나가 조류를 대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인물들과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또 어떨까요. 자크 타티의모자와 파이프 담배와 재킷과 우산이 없었다면 그는 과연 영화사의 가장 위대한 희극 캐릭터 중 하나인 윌로씨가 되는 게 가능했을까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마릴린 먼로가 우쿨렐레를 튕기며 춤추는 장면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는 장면이 없었다면 두 인물은 지금처럼 사랑받았을까요. 기괴하고 해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서구와 아시아의 두 대가 루이스 브뉘엘과 이마무라 쇼헤이가 <범죄에 대한 수필>을 만들고 <인류학 입문>을 만들 때, 음욕과 광기로 실성해버린 영화 속 두 남성주인공들을 만들 때,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여인 모형의 마네킹을 활활 타는 아궁이에 던져넣거나(<범죄에 대한 수필>), 그 음부에 음모를 한올 한올 정성스럽게 심을 때(<인류학 입문>), 비로소 그 인물들의 끔찍한 실성을 우린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물들이 언제나 같은 의미로 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황야의 결투>에서 헨리 폰다가 느슨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저 멀리에 시선을 던질 때 걸터앉아 있던 그 나무 의자는 진 켈리와 도널드 오코너가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춤을 추고 스텝을 맞추기 위해 흔들고 뒤집는 그 나무 의자와는 또 다른 것이겠지요. 존 포드의 영화에서 액션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그 무수한 술병들이 던져지는 것이라면, 오즈의 영화에서 맥주병들은 거의 변치 않을 기하학적 형상으로 인물들의 곁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겠지요.
거울에 숨은 이야기들
그러고 보니 이제는 거의 영화적 사물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자주 출몰하는 대표적 사물도 한 가지 떠오릅니다. 거울, 말입니다.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분열과 광기로 가득 찬 마틴 스코시즈의 두편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와 <분노의 주먹>의 장면들을 말해볼까요. <택시 드라이버>의 미친 정의의 사도 트래비스 역을 맡은 로버트 드 니로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상대로 “뭐? 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야?” 하며 지껄이는 장면은 무수한 영화를 통해 여전히 감독들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분노의 주먹>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복싱 선수 제이크 라모타가 몰락 끝에 전성기 시절 무용담이나 팔아먹는 밤무대 코미디언으로 전락하여 무대 대기실의 거울 앞에 앉아 그날 밤에 할 대사를 중얼거리는 마지막 장면의 쓸쓸함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관객이 감동받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거울들은 나열하기엔 너무 많습니다. 어쩌면 유능한 영화사가에 의해 거울의 영화사로 거대하고 새롭게 정리될 수도 있을 문제인 것입니다.
문득 이런 장면이 기억납니다. <스모크2: 블루 인 더 페이스>에 카메오 출연한 자무시는 담배 가게에 들러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담배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담배는 어딘지 죽음과 일맥상통하는것 같아…. 뿜었다 사라지는 연기를 보면… 죽음도 삶의 연장이라는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주지.” 그게 실제로도 애연가인 영화감독 자무시의 상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후에 자무시는 결국 커피와 담배라는 사물들로 <커피와 담배>라는 인생에 관한 우아한 한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니까요. 모두에겐 각자의 사물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의 관심을 끌고 촉각을 세우게 하는 영화 속 사물은 무엇입니까, 질문하면서 말입니다. 이건 영화에 관한 아주 길고 다채로운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