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희 미술감독/<박쥐> <마더> <괴물>
인상 깊은 오브제들이 많지만 ‘사물’이라고 말하는 순간 두 가지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양들의 침묵>(1991)에 나오는 스킨 슈트다. 살인마 버팔로 빌은 납치한 여성들의 피부를 벗겨 옷을 만드는데 살아 있는 사람을 옷으로 만든다는 행위가 무척 충격적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사람을 사람이 아닌 하나의 물질로 이해하는 살인마의 정신 상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소품이다. 나아가 살아 있는 대상을 옷으로 바꾸는 일련의 사물화 과정이 악이라는 존재를 물질화시킨, 악의 현존을 눈앞에 구현한 소품이다. 두 번째는 <시계태엽 오렌지>(1971)에 나오는 남근 형상의 거대한 조형물이다. 미술감독으로서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 입장에서도 영원히 남을 이미지다. 폭력이라는 추상을 사건과 행위로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폭력 그 자체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제시하고 관객의 반응을 기다린다. 단호한 태도로 대상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 군더더기 없이 제시된 대상 앞에서 관객은 피할 도리 없이 이것을 받아들인 뒤 각자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해석과 완성을 관객의 몫으로 돌린 그 단호한 미학적 태도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조화성 미술감독/<감시자들>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대개 특정 사물이나 소품을 발견하기 위해 영화를 보진 않는다. 드라마를 따라가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눈에 띄는 사물이 좋은데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의 마이크로버스가 그런 경우다. 무능력한 가장, 담배로 스트레스를 푸는 엄마,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아들, 죽을 때가 다 되어가는 할아버지, 자살 시도 경험이 있는 삼촌이 결코 예쁘지 않은 막내딸의 미인대회 참가를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이 버스라는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녹아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흩어진 조각들이 시종일관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하나로 뭉쳐지는 느낌을 안긴다. 특히 온 가족이 함께 차를 밀다가 한명씩 뛰어 올라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순간 모두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협력하는 모습이 곧 영화의 주제를 반영한다. 인물들의 동선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으면서도 의미 부여가 충분히 된 적절한 소품이다. 넓고 탁 트인 자연을 배경으로 조그만 미니버스를 와이드 앵글로 찍을 때는 마치 이 차가 영화 자체인 것처럼 보일 정도. 귀엽고 따뜻하지만 내부적인 불안을 내포한 노란색의 사용도 좋다.
조성원 미술감독/<전설의 주먹> <글러브> <이끼>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는 독특하고 우울한 소재, 끈적거리는 스팅의 음악, 배우들의 명연기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죽기 위해 술을 마시는 알코올중독자 벤(니콜라스 케이지)과 그런 벤을 사랑하는 세라(엘리자베스 슈).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말 없이 이해하고 감싸안는다. 세라가 벤에게 첫 선물로 준 ‘힙 플라스크’ (일명 휴대용 위스키 병)는 소유하거나 정복하려 하지 않는 두 사람의 존중과 사랑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감독은 벤의 마지막 순간까지 힙 플라스크를 그의 손에 쥐어주는데 점점 힘겹게 마개를 여는 미묘한 차이로 벤의 변화를 표현했다. 캐플릿가와 몬태규가의 대비를 보여주는 패션과 각종 소품들이 인상적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1996)의 ‘총’도 매혹적이다. 남미를 연상시키는 뜨겁고 열정적인 분위기의 중심에는 인물들이 항상 차고 다니는 총이 있다. 감독은 서로 형태와 치장이 다른 총을 자주 클로즈업해 각각의 무리의 특성을 정확히 잡아준다. 이 영화에서 두 가문의 몰락은 독약이 아닌 총으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독은 원작에 없던 폭력의 에너지를 총이라는 소품에 담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