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의 집착, 나의 영감
2014-04-08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씨네21 사진팀
이명세/이준익/박찬욱/봉준호에게 묻다… ‘나만의 사물들’
박찬욱 감독.

영화와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닫는 이 지면에선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려 한다. 감독들이 일상에서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은 종종 영화 연출의 원동력이 되거나 적절한 활력소가 되어주기도 한다. 창작자의 개인적 취향과 영화적 스타일이 완전히 별개가 아닐 거란 믿음으로, 그 대답이 궁금한 한국 감독들에게 직접 물었다. 당신이 아끼는 물건은 무엇입니까, 라고.

봉준호 감독의 가방 속에는 엽서 사이즈의 공책이 항상 들어 있다. 작아도 “두께는 단행본 수준”이란다. 봉준호 감독은 이 공책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 지난 4~5년간 봉준호 감독이 작업했던 영화, <도쿄!> <마더> <설국열차>의 중요한 아이디어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공책을 다시 보니 어떤 영화를 구상할 때 최초로 떠올랐던 생각들이 거기 있더라. 예를 들어 ‘기차는 1년에 한 바퀴를 돈다’ (<설국열차>)는 개념을 처음 잡은 순간도 기록되어 있고, ‘다섯살 때 농약을 먹었다. 약한 농약이다. 농약 먹고 바보가 된 걸까?’(<마더>의 도준) 같은 메모도 있었다.” 지난 5년간 봉준호 감독의 마인드 매핑을 기록한 이 공책은 지난해 말 수명을 다했다. 하지만 (첫 번째 공책과 마찬가지로) 해외 출장길에 구입한 두 번째 공책에는, 벌써 “두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박찬욱 감독이 아끼는 물건은, 잘 알려진 대로 ‘카메라’다. 그가 늘 지니고 다니는 두대의 카메라는 라이카의 M-E와 M모노크롬이다. 컬러사진을 찍고 싶을 때는 M-E를, 흑백사진을 찍을 경우에는 M모노크롬을 사용한다. 다양한 20여 기종의 카메라를 보유하고 있는 그이지만, 라이카에 대한 애정은 더 깊은 듯했다. “라이카가 좋은 이유? 렌즈의 성능이 우월하고, 색감이 가볍지 않으며 차분하고 품위 있다. 그러면서도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눈으로 보는 것에 가깝게 찍힌다. 흑백사진을 찍을 때에는 완전한 화이트에서 블랙에 이르기까지 색감이 세밀하고 풍부하더라. 마지막으로,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이 답변이 박찬욱 감독의 취향과 스타일에 대한 얼마간의 단서가 되길 바란다. 그가 최근 주로 찍고 있는 대상은 ‘풍경’이라고.

이명세 감독.

‘모자’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이준익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그는 ‘오토바이’를 먼저 언급했다. “시내에서 이동할 땐 스쿠터를 타고, 좀 멀리 탈출하고 싶을 때에는 오토바이를 탄다.” 이준익 감독에게 오토바이를 탄다는 건 ‘기마 민족’의 후예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란다. 그는 “마차가 발전해서 자동차가 되었고, 말이라는 교통수단이 발전해 오토바이가 되었”으니, 지금 이 시대에 오토바이를 타는 건 옛날 사람들이 도심에서 말 타는 기분과 다를 게 없을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어쩐지 그 대답이 호방한 그의 사극 속 인물들이 할 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모자 마니아는 바로 이명세 감독이다. 그는 지난 15년간 같은 모자를 썼다. 2000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마이애미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 집행위원장이 선물해준 영화제 모자다. “그분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본 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듣고 난 뒤 나도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이 모자에 써 있는 문구도 ‘포 더 러브 오브 필름’이다.” 그렇게 마이애미영화제 모자는 이명세 감독의 일부분이 됐다. 하지만 모자는 소모품이다. “사실 이전에 썼던 모자는 완전히 낡아서 더이상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 배우 공효진의 매니저가 이 모자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나도 이것과 결별하고 새롭게 출발해보자는 생각에 그에게 모자를 건네줬다.” 그러나 ‘마이애미’ 모자의 기운은 강력했다. “새 모자를 썼는데, 도저히 일이 안 풀리”더라고 고백한 이명세 감독은 집 안을 뒤져 똑같은 모자를 하나 더 찾아냈고, 최근까지 그 모자를 쓰고 있다. 마이애미 모자가 일종의 영화적 ‘부적’이라고 말하는 이명세 감독은 앞으로 이 모자가 마르고 닳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에게 양도할 생각이 없다. 오랫동안 두고 보며 영화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사물 퀴즈 정답

01 역삼각형 검은 두건. 02 시즈오카역 앞. 03 커튼을 소리나지 않게 쳐주는 커튼레일 작동기. 이쯤 되면 커튼에 대한 집착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04 <생활의 발견>(영화 전반부에는 ‘참이슬’, 후반부 경주 장면에는 ‘참소주’가 나온다). 05 <The Case> 06 매핑 드론(Mapping Drone). 동굴 내부를 스캔하는 이 기계는 선풍기의 홀로그램 버전이라 할 만하다. 07 양고기 스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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