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동물이며 정신적인 존재이다. 가끔 동물성이 과잉될 때도 있고, 이성이 감정을 이길 때도 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 간극을 파헤치며 이야기를 발전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인간 내면은 ‘소주’를 통해서 드러난다. 맥주나 막걸리도 등장하지만, 비율 면에서 소주가 월등히 높다.
2002년작 <생활의 발견>은 아예 소주를 상기시키는 초록 빛깔로 시작된다. 생소한 초록색 타이틀 다음에, ‘비내리는 골목길’이 등장한다. 투명한 빗길을 뚫고 택시에 오른 경수(김상경)는 춘천에 사는 선배와 통화한다. 선배의 목소리는 술에 취해 있다. 그는 아마 소주를 마셨던 것 같다. 이튿날 경수의 침대 맡에도 소주병이 놓여 있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는 대사 뒤에는 이렇듯 소주가 버티고 있다. 만일 그날 밤 경수가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소주를 빌미로 경수는 춘천으로 떠난다.
홍상수의 캐릭터는 전국으로 여행을 간다. <하하하>(2009)의 문경(김상경)은 통영에서 소주를 마시고, <강원도의 힘>(1998)의 상권(백종학)은 강원도에서 소주를 마신다. 한편 2006년작 <해변의 여인>의 중래(김승우)는 안면도로 떠난다. 서울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던 중래는 안면도에 도착하자마자 소주를 마신다. 그 덕에 중래는 은수(고현정)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 아마 소주가 없었다면 관객은 우아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중래만을 보았을 것이다. 술을 마신 은수가 흘리는 ‘깨끗한’ 눈물처럼, 그들의 식탁에 놓인 소주잔은 맑고 투명하다. 투명한 잔이 마음을 비추고, 사랑의 감정을 끌어올린다. 이때의 소주는 서투름을 무마시키고, 이상한 왜곡에도 아랑곳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담긴 매체다.
이 관습적 도덕이 머무는 곳은 비단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밤과낮>(2008)에서 프랑스의 와인잔에 담긴 소주를 발견하고, <다른나라에서>(2012)에서는 프랑스인이 던지는 소주병을 본다. 김성남(김영호)은 마음에 담긴 ‘위대한 화가의 꿈’을 소주를 벗 삼아 이야기하고, 안느(이자벨 위페르)는 소주를 마신 뒤에야 진정한 ‘등대’를 찾아서 떠난다. 그런 면에서 안느가 외치는 “I like Soju”야말로 홍상수 영화 전체의 슬로건이라고 할 만하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일이 힘들 때, 소주가 등장해 일깨워준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서로 나누라고 말이다.
사물이 감독에게
“<다른나라에서>를 촬영할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바닷가에 쓰러져 있는 저를 툭툭 차던 금희씨(문소리)의 발길질 말입니다. 속 좁은 놈이라고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그때는 좀 섭섭했습니다. 저는 감독님 영화에서 그보다는 더 귀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거든요. 그런 점에서 <우리 선희>가 있는 것처럼, <우리 소주>가 있는 건 어떨까요? 저를 좀더 예쁘게 다뤄주는 그런 영화 말입니다. 저, 잘할 수 있습니다!
사물 퀴즈 04
<해변의 여인>에는 ‘처음처럼’ , <하하하>에는 ‘화이트’, <다른나라에서>에는 ‘하이트’와 ‘참이슬’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참소주’가 등장하는 홍상수의 영화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