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린치는 말한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관에 들어가 불빛이 꺼지는 순간은 마술적인 느낌이 든다.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고 커튼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아마 커튼은 붉은색이리라. 그러면 당신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린치의 영화는 꿈이다. 흔히 몽환적, 환상적이라고 표현되는 모호한 분위가 그렇고 최면을 걸듯 당신을 이끌고 들어가는 과정이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딱 들어맞는다는 점에서도 그의 영화는 꿈의 표상이다. 가령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두고 개연성과 서사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어도, 연결되지 않는 듯 보여도 이 영화 속 각 장면들은 살아 움직여 관객을 납득시킨다. 당신의 꿈이 그런 것처럼 린치의 영화는 우리를 설득시키는 대신 헤어나올 수 없도록 만든다.
린치는 영화와 꿈의 유사성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커튼을 활용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주인공 리타는 갑자기 갈 곳이 있다며 실렌시오 극장으로 향한다. 붉은 커튼이 사방에 드리워진 그곳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회자는 말한다. “밴드는 없다. 오케스트라도 없다. 녹음된 음악이 흘러나올 뿐이다. 모두 테이프이다.” 그렇다. 이것은 영화다. 이 장소가 곧 영화이자 영화를 보는 행위의 상징이다. 린치는 이 침묵의 극장 안에서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언제나 커튼이 함께한다. 린치 스스로가 밝히듯 커튼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 다른 세계로의 돌입을 뜻한다. 우리가 이 꿈을 깰 수 있는 것은 린치가(혹은 그의 영화가) 모든 것을 마치고 이를 허락해주었을 때뿐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마지막 장면, 악몽처럼 덮쳐오는 사람들로 인해 침대에 쓰러진 여인은 투명한 커튼 뒤로 사라진다. 이 순간 우리는 또 한 차례 꿈이 끝났음을 느낀다. 뒤이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실렌시오 극장의 한 여인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침묵. 이 역설적인 장면에서 극장 안에 드리워진 붉은 커튼은 세계를 가르는 두꺼운 벽이자 꿈의 문이 된다. <트윈 픽스>에서는 좀더 직접적이다. 붉은 커튼으로 둘러싸인 방은 직접적으로 ‘꿈’을 묘사한다. 여기서 붉은 커튼의 방은 꿈과 현실 양쪽을 오가는 공간이다. 이 장면 이후 붉은 방, 커튼, 난쟁이, 거인, 꿈, 기묘한 신시사이저 음악 등은 린치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직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붉은 커튼의 방은 곧 무의식의 세계다. 왜 하필 붉은색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극장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견고하고 안락한 환상의 공간이면서 한편으론 손쉽게 열어젖혀 깨버리기 쉬운 공간. 마치 영화관을 본뜬 듯한 꿈꾸기. 혹은 영화라는 이름의 꿈. 데이비드 린치라는 환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혹은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다면 바로 이 커튼을 살짝 걷어볼 필요가 있다. 그 뒤에 무엇이 숨어있을지 두려울지라도.
사물이 감독에게
데이비드 린치, 당신 자신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울을 들여다보거나 스스로와 대화를 한다고 당신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당신 내부에, 내부에, 내부에 있으니까. 사물들은 저마다 나름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들어가 경험해보고 싶은 것은 그러한 세계다. 내가 당신을 그 세계로 안내해주려고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나를 사방에 둘러치시라. 내가 당신의 영화관이 되어줄 테니.
사물 퀴즈 03
린치가 감독한 <트윈 픽스> TV시리즈에는 이상한 커플이 등장한다. 주유소를 경영하는 빅 애드와 그의 아내 네이딘. 애꾸눈인 네이딘은 어떤 물건의 발명에 매달리는데 이후 그 물건을 완성한 뒤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다. 결국 그 충격으로 자살까지 시도한 뒤 정신적인 장애를 겪는다. 그녀가 만들고자 했던 물건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