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불길한 바람이 분다
2014-04-08
글 : 장영엽 (편집장)
리들리 스콧의 선풍기
<블레이드 러너>

1990년 LA에서 열린 <블레이드 러너> 시사회에서(‘로스앤젤레스 안의 로스앤젤레스’라는 영화제 행사의 일환이었다.-편집자) 리들리 스콧은 한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의 영화에는 자주 선풍기가 등장하는데, 거기에 특별한 이유나 의미가 있냐”라는 것이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리들리 스콧은 이렇게 맞받아쳤다고 한다. “음, 선풍기는 당신을 시원하게 해주잖아요.”(Well, they keep you cool.)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였을 거다. 하지만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일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에 부합하는 최적의 비주얼을 이끌어내는 것이 장기인 데다 시대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은 감독의 영화에 어떤 물건이 자주 등장한다면, 그리고 그 물건이 선풍기라면 이유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비록 감독 본인에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짐작가는 바는 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물증부터 들여다보자. <블레이드 러너>에선 초반부 시퀀스부터 선풍기가 등장한다. 지구에 잠입한 레플리칸트(인조인간)를 찾는 테스트에서, 수사관(홀든)과 조사받는 자(레온)의 머리 위로 천장용 선풍기의 거대한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대목은 이 영화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다. 2019년 LA의 황량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돋우는데 일조했던 그 프로펠러는 <한니발>의 여형사 스탈링의 집 천장, 억울하게 놓친 범죄자를 찾아 헤매던 <블랙 레인>의 형사 닉이 당도한 나이트클럽에서도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리들리 스콧이 천장용 선풍기만 선호한 건 아니다. 작동이 되기는 하는 건지 의심되는 낡은 선풍기부터 벽에 설치된 환풍기와 풍력발전기까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스콧의 영화에서 ‘날개 달린’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편의상 이 모든 것들을 ‘선풍기’로 통칭하기로 하자).

재미있는 건 선풍기가 등장하는 타이밍이다. <한니발>에서 우리의 눈에 선풍기가 들어오는 순간은, 스탈링이 한니발의 가택 침입을 눈치채는 장면에서다. 불길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집어드는 스탈링의 모습 뒤로 천장에 달린 선풍기의 커다란 프로펠러가 유유히 돌아간다. <블레이드 러너>에선 선풍기가 등장한 뒤 우물쭈물하던 레온이 레플리칸트로 돌변해 홀든을 벽 너머로 날려버린다. 다시 말해 리들리 스콧 영화에서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던 장면에 갑작스러운 사건이 끼어들 때, 중요한 국면의 전환을 앞둔 긴장감 가득한 순간에, 그곳에는 어김없이 선풍기가 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 절묘한 순간에 등장하는 이 물건의 의미를 그러므로 이렇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리들리 스콧표 스릴러의 시한폭탄 잠금 해제 장치. 또는 ‘진짜 흥미진진한 대목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라는 전언. 인물과 공간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영화의 이야기와 정서를 고양시키는 데 일조하는 리들리 스콧의 선풍기는, 언제나 빛보다 어둠에 더 매혹되는 듯 보였던 그의 누아르적인 세계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앞서 언급한 리들리 스콧의 대답을 정정해야겠다. 선풍기가 당신을 시원하게 해준다고? 틀렸다. 선풍기는 당신의 간담을 서늘하게(cool) 만들 거다.

<한니발>

사물이 감독에게

내가 현대의 산물이란 건 알고 있겠지. 자네가 <글래디에이터>나 <로빈 후드> 찍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내 기다란 프로펠러로 주인공 맡은 놈을 (둘이 상당히 닮았던데…) 빨리 보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헛헛하고 섭섭했다고. 앞으로 사극은 좀 자제하고, SF나 누아르에 주력하도록 해. 시대가 변했으니 내 새로운 외모도 좀 고민해주고. 멋지게 등장할 자신은 있어. 주인공 얼굴에 그림자 드리우며 느긋하게 움직이면 되는 거지? 좋았던 시절처럼.

사물 퀴즈 06

리들리 스콧의 2012년작 <프로메테우스>에는 선풍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풍기와 매우 흡사한 모양과 움직임을 보이는 존재가 등장한다.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