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신체와 감각, 에너지의 영화 - 김지훈 교수, 필립 그랑드리외를 만나다
2016-05-17
글 : 김지훈 (중앙대학교 교수)
사진 : 최성열

글: 김지훈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교수

극장용 영화와 영상 설치작품을 넘나드는 필립 그랑드리외의 작업은 이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탐구한다. 이미지는 어디에서 생성되는가? 그 이미지는 무엇을 표현하고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그의 초기작 <음지>(1998)와 <새로운 삶>(2002)부터 이미지는 칠흑 같은 어둠 또는 초점이 불투명한 세계에서 형성된다. 몽환적 카메라 이동, 극단적 클로즈업, 페이드와 다양한 노출효과를 통해 전시되는 그 이미지는 신체의 형상이자 변모하는 풍경이다. 이미지는 신체가 발산하는 감각과 에너지에 맞춰 파동을 일으키고 기묘하게 변형된다. 신체와 감각, 에너지의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그랑드리외의 작업은 시간과 공간의 4차원을 개방하고 정신과 자연의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할 수 있는 영화를 실천했던 장 엡스타인, 그리고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얼굴과 몸짓을 표현해온 필립 가렐을 환기시킨다. 그러면서도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들과 갈라선다. 그의 영화를 ‘뉴 프렌치 익스트리미즘’으로 범주화하게끔 만든 원시적 충동, 극단적인 성적 행위, 폭력적 제스처, 암울한 혼돈과 같은 센세이셔널한 요소들만이 아니다. 그랑드리외는 관습적인 내러티브 영화를 구축하는 인과관계의 압박과 연속성의 법칙, 재현의 논리로부터 극단적으로 결별하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발전시킨다. 심지어 간헐적인 생략과 모호성의 미학에 의존하고 미장센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는 유럽 예술영화의 가정에도 도전한다. 습관적인 지각 너머의 시각을 탐험하는 그의 영화는 이미지의 무한한 변형과 다채로운 리듬감, 사운드의 풍부한 질감으로 관람자에게 매혹과 혼란 모두를 선사한다. 이 인터뷰에서 그랑드리외는 자신의 영화 작업방식과 자신이 규정하는 영화예술의 이념은 물론 자신의 작품들을 특징 짓는 키워드들의 풍부한 의미를 철학과 예술의 전통들과 함께 상세하고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필립 그랑드리외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필립 그랑드리외: 영화언어의 재발견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이름의 회고전을 가졌다. 1041호에 실린 장병원 프로그래머의 필립 그랑드리외 작품세계에 대한 원고에서 이어지는 심화 인터뷰로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다.-편집자).

<밤임에도 불구하고>

-니콜 브레네즈와 가진 2000년 인터뷰에서 당신은 “신체와 사유, 신체와 감각은 영화가 참여하는 동일한 구조”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당신의 영화가 이미지 안에 담긴 신체와 감각뿐 아니라 영화의 신체 자체, 이미지의 감각 자체를 탐구한다는 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영화가 강력한 예술이라고 믿는다. 영화의 힘은 어두운 방, 침묵, 정지 이미지처럼 신체의 위치가 갖는 구조 못지않게 영화 안에, 영화 자체의 구조 안에 있다. 영화사를 통틀어 영화의 대부분은 서사의 위치, 시퀀스, 신에 따라 결정된다. 이 요소들은 내레이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한된다. 나는 이런 방식이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하는 방식으로는 약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은 강도(intensity), 센세이션, 정동(affect)에 대한 모든 질문을 서사에 대한 질문의 통제 아래 놓기 때문이다. 내레이션, 캐릭터, 스토리 등은 물론 모두 중요하다. 내가 실험영화 자체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요소들에 대한 질문은 프레이밍, 지속, 커팅, 조명, 사운드와 관련된 질문, 즉 영화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다. 캐릭터와 이야기에 접근하는 문제는 감각에 대한 문제다.

-신체와 감각에 대한 탐구, 충동과 잔혹성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미지를 신체에 내재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당신의 아이디어는 앙토냉 아르토, 질 들뢰즈, 모리스 메를로 퐁티, 자크 라캉의 프랑스 현대철학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그 모든 사상가들이 각각 다른 측면에서 나의 영화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아르토는 ‘마술과 영화’(Sorcellerie et cinema, 1927)라는 글에서 영화가 지성이 아니라 뉴런 시스템을 직접 자극함으로써 사유와 느낌으로 관람자를 유도한다는 믿음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나는 이런 믿음이 영화가 지적 과정이나 지식이 아니라 관람자의 신체 내부에 직접적으로 접촉한다는 관념에 매우 가깝다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철학은 강도와 정동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시네마1, 2> 못지않게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저서인 <감각의 논리>가 흥미로웠다. 불가능성으로서의 실재라는 라캉의 정신분석학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모든 철학자들의 지적, 개념적 질문들과 영화에 대한 질문들을 흥미롭게 여기고 내 영화가 그것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영화를 구상할 때는 철학자들의 개념과 사유를 의식하지만 영화 제작 중에는 스스로의 느낌, 감각, 인상 속에서 작업한다.

<화이트 에필렙시>

혼돈 속에서 형태를 발견하기

-신체와 감각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당신의 영화를 특징 짓는 여러 센세이셔널한 요소들, 그러니까 섹스, 마약, 환각, 악몽, 혼돈, 트랜스와 같은 요소들을 불러왔다. 당신은 이런 영화들에서 내러티브를 중요하게 고려하는가.

=내러티브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순수 실험영화가 아름답긴 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는 보다 고전적인 쪽에 가깝다. 그러나 섹슈얼리티, 잔혹성, 폭력, 신체 등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들뢰즈적으로 그것들을 다룬다. 나는 신체의 파동, 느낌과 감각의 파동, 떨림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는 이런 요소들을 질문하는 데 중심에 있다.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그런 요소들을 취급하는 것이 내 영화적 과정의 중심에 있다.

-당신은 신체와 감각, 접촉의 문제를 탐구하는 클레르 드니, 브루노 뒤몽, 가스파 노에의 영화들과 나란히 놓인다. 다른 한편으로 당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당신의 영화는 2000년대 이후부터 유행한 ‘뉴 프렌치 익스트리미즘’의 일종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복잡한 질문인데 난 내 영화가 ‘뉴 프렌치 익스트리미즘’의 범주로 상영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런 영화들이 추구하는 섹스와 폭력의 묘사와 내가 그런 소재들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또한 나는 재현과 미장센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드니나 뒤몽, 노에와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감독들은 시간의 연속성을 구축하는 속에서 영화적 공간을 구축한다. 이는 그들의 영화에서 어떤 종류의 커팅,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신체를 프레임 안에 조직하는 어떤 방식들이 연속성의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뜻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는 않는다. 즉 나는 연속성의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서 신들을 커팅에 귀속시키는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나는 신을 이미지 각각의 가능성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두 숏 사이의 화합이 아니라 대결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질문한다. 다시 말하자면 강도와 파동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적 공간을 분자적(molecular)으로 조직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는 재현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뉴 프렌치 익스트리미즘’이나 앞서 말한 감독들의 영화와 내 영화를 비교하는 평론가들은 내 영화가 실제로 어떤가를 자세하게 보고 있지 않다. 신체, 폭력, 섹슈얼리티의 관념, 사운드라는 면에서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그런 영화들과 내 영화는 결코 같지 않다.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영화들에서 캐릭터가 미리 구축되어 있다면 내 영화에서 캐릭터는 불확실하고 포착하기 힘들다.

<호수>

-그런가 하면 일부 평론가들은 당신의 영화를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와 비교하기도 한다.

=훨씬 가깝다. 그는 놀라운 감독이며 <로스트 하이웨이>(1997)와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매우 좋아한다. 그렇더라도 린치 역시 재현의 질문, 미장센의 질문 안에서 작업한다. 비록 린치의 영화에서 시공간이 처음과 끝이 연결되는 곡선처럼 표현되지만 내러티브가 구축하는 시공간이라는 차원에서는 여전히 고전적이다. 내 영화는 보다 혼돈스럽고 불편한 세계 안에 있고 그 세계에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탐구한다. <감각의 논리>가 내게 중요한 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어떻게 형상에 접근하는가를 완벽하게 밝혔다. 그림이라는 것은 캔버스가 있고 형태가 주어지지 않은 것과 같다. 거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형상에 도달하는 것은 사막에서 그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사막은 세계의 혼돈으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미장센을 구축하는 법은 이처럼 회화적인 과정에 훨씬 가깝다. 영화를 작업할 때 나는 장면이 어떻게 구축되어야 할지 미리 정하지 않고 빛과 배경, 배우들을 보고 그림을 그리듯이 작업한다. 이는 혼돈 속에서 형태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베이컨 이외에도 어떤 다른 화가들이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는가.

=내게 중요했던 화가는 구스타프 쿠르베와 에드가 드가, 엘 그레코 등이다. 이 화가들 또한 나와 유사한 것을 질문하고 탐구한다. 즉 인간의 형상에 대한 충실한 재현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태에 접근하기 위해서 신비로운 과정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들의 어떤 형상들은 늘어나고, 자연의 본성과 인체의 표현은 완결되지 않는다. 바로크 회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의 작품에서 중요한 관심사는 바로 힘들이다. 즉 이 화가들은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힘들을 그렸고 힘들의 형태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화 일반은 힘들을 표현하는 데 상대적으로 약한데 영화는 일반적으로 힘들을 심리적 요인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화이트 에필렙시>(2012)와 <위협>(2015)은 극장용 영화이지만 영상 설치작품의 문법들과 관심들이 전면에 드러난다. 스크린을 수직 포맷으로 구성했고, 신체의 이미지가 3차원적으로 변형된다. 이 영화들을 극장으로 연장된 비디오아트로 여길 수도 있겠는가.

=이 두 작품은 나 스스로의 영화에 대한 접근 방식을 연장하는 동시에 영화가 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또한 영화와 영상 설치작품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며 작업했고 그런 점에서 극장에서의 상영과 갤러리에서의 전시 모두가 가능한 작품으로 구상했다. 한편으로 이 두 작품은 신체가 다른 감각들로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두 작품은 사건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화이트 에필렙시>는 기이하게 전개되는 성적 행위라는 사건을, <위협>은 신체의 진행과 변형이라는 사건을 다룬다.

<음지>

내러티브 영화와 추상적인 영화 사이를 왕복하다

-당신은 실험적 비디오와 영상 설치작품들을 함께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당신의 작업들은 최근에는 극장 못지않게 미술관에서 무빙 이미지 설치작품의 일부로 평가되고 수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 두 유형의 예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영화와 영상 설치작품은 장치는 물론 관람 방식에 있어서도 다르다. 더글러스 고든의 <24시간 사이코>(1993)처럼 예술가가 영화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들이 충분히 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인 동시에 제도적인 차이를 수반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저렴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동시에 강력한 경험이다. 그런데 미술관에서는 큐레이팅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새로운 종교이자 성당처럼 기능한다. 이는 오늘날 권력의 새로운 표현 방식이지만 지루하기도 하다. 물론 나는 극장과 미술관 사이를 왕복하면서 다른 형태로 나의 작품을 상영하거나 전시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일차적으로는 영화감독으로 생각하고 영화를 사랑한다. 영화에서는 느낌과 감각이 중요하다. 반면 미술관에서의 설치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성과 개념이 더욱 중요하다.

-사운드가 당신의 작업에서 갖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사운드는 어떤 경우에 이미지보다 더욱 중요하다. 사운드는 픽션으로 접근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작업을 할 때 나는 이미지를 먼저 촬영하고 그게 끝나면 사운드를 작업한다. 편집은 이 두 요소가 결합하는 과정이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내 영화에서 같은 층위에 있다.

-최근작 제목은 <밤임에도 불구하고>(2016)이다. 당신의 영화에서 어둠이 갖는 의미가 궁금하다.

=나는 영화에서 어둠이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 감정과 연결되어 있고 형상이 어둠에서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라스코동굴에서 발견된 원시인의 벽화는 어둠에서 인류의 첫 번째 형상이 태어나고 어둠으로부터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비롯되었음을 말해준다. 어둠은 세계 안에 있고 형태는 바로 거기에서 태어난다. 즉 어둠은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근본적인 내부성(interiority)이다.

-<밤임에도 불구하고>에서 당신은 <음지>(1998)나 <새로운 삶>(2002)과 같은 내러티브 영화로 돌아갔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에 대해 알려달라

=기본적으로 나는 내러티브 영화와 보다 추상적인 영화 사이를 왕복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구상할 때 몇개의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즉 각각의 캐릭터가 어둡고 모호하고 무한한 하나의 힘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 소설에서 받은 영감을 더했다. 주인공 렌츠는 무언가를 탐색하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캐릭터와 공명하고 그가 찾는 마들렌은 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기억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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