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조상경 의상감독의 스튜디오 ‘곰곰’의 문을 두드렸다. 스튜디오 한쪽으로 거대한 옷장이라도 열린 듯 셀 수 없이 많은 의상들이 걸려 있다. 그 너머로 용도별로 정리된 옷들만 해도 박스로 여럿이다. 옷들 사이에는 어떤 영화의 의상인지를 알려주는 명패가 걸려 있다. 최근 개봉한 <밀정>(감독 김지운, 2016)과 <아수라> (감독 김성수, 2016)에 이어 방문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국영화 기대작들의 이름표가 줄줄이다. 후반작업 중인 <더 킹>(감독 한재림), <리얼> (감독 이정섭), <마스터>(감독 조의석)에 이어 현재 맹렬히 촬영 중인 <군함도>(감독 류승완), <신과 함께>(감독 김용화), 그리고 프리 프로덕션 준비가 한창인 <VIP>(감독 박훈정)와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의 의상들까지 곳곳에 보인다. 이 모든 쟁쟁한 한국영화들의 ‘룩’이 바로 이곳 조상경 스튜디오에서 시작된다. 구경꾼의 눈이 쉼없이 돌아갈 때쯤, 조상경 의상감독이 <VIP>의 배우 의상 피팅 작업을 마치고 바쁘게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인터뷰어에게 조상경 의상감독은 이야깃거리가 마르지 않는 샘이다.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로 데뷔한 이후 김지운, 류승완,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 등 200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감독들과 함께 현재까지 협업하는 최고의 파트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왜 조상경인가’라는 질문은 ‘역시, 조상경!’이라는 확신의 느낌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양질의 작업물을 내온 조상경 의상감독 스토리는 <씨네21>의 단골 취잿거리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의상감독 조상경 1인의 재능이 아니라 그녀의 작업 방식, 스튜디오 ‘곰곰’의 시스템을 좀더 깊숙이 살펴보려 한다. 수많은 한국영화를 동시다발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영화계의 까다로운 미감자들의 의뢰가 끊이지 않는 이유, 곧 조상경 스튜디오의 영업 비밀이다. 한국영화 제작 현장의 일면이자 의상 스탭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추측까지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조상경 의상감독이 서울 중심가에서 경기도 외곽으로 스튜디오를 옮긴 건 불과 2년 전이다. <군도: 민란의 시대>(감독 윤종빈, 2014)가 촬영 중이었고 프리 프로덕션을 막 끝낸 <협녀, 칼의 기억>(감독 박흥식, 2015)이 촬영에 돌입하던 때다. <상의원>(감독 이원석, 2014)의 프리 프로덕션 준비까지 겹친 그 바쁜 와중에 대대적인 이사를 강행했다. 이유는 하나, 스튜디오의 장기적인 비전을 위해서다. “팀원들이 동대문의 좁은 스튜디오에서 사극에 쓸 옷감의 염색을 하는 걸 보는데 안 되겠더라. 멀리 보면, 사극은 꼭 해야 한다. 특히 직접 옷을 제작하는 우리 팀에겐 공간 확보가 필수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시대극 의상 제작을 일종의 “투자”라고 말한다. “시대극을 소화할 수 있는 의상팀 자체가 별로 없다. 의상실장 혼자 할 수 있는 장르도 아니고. 나도 데뷔하고 나서 <후궁: 제왕의 첩>(감독 김대승, 2012)으로 사극을 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버선 한짝부터 다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노동량이다. 예산 맞추기도 쉽지 않다. 트렌드에 민감한 현대극으로는 한계가 온다. 요즘은 스타일리스트가 현대극 의상을 하잖나. 영화의상으로 장수하려면 전문화돼야 한다. 옷의 성격상 특수하고 물량도 많이 투입되는 사극, 시대물로 갈 수밖에 없다.”
네명의 실장들의 특장점을 살려라
규모를 키운 조상경 스튜디오에는 곽정애, 손나리, 윤정희, 최윤선이라는 4명의 의상실장이 있다(최윤선 의상실장은 <택시운전사>(감독 장훈) 촬영으로 이날 인터뷰에 참석하지 못했다.-편집자). 다들 의상감독으로 데뷔까지 했지만 ‘따로 또 같이’라는 개념으로 조상경 스튜디오에서 협업과 분업을 이어간다. 조상경 스튜디오의 다작 시스템의 핵이라 부를 만하다. 조상경 감독은 “시나리오를 받으면 어떤 장르의 이야기이고,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부터 플랜을 짠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의상실장 중 누가 합류하면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선다. 적임자인 실장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암살>(감독 최동훈, 2015)은 1930년대를 이해하고 모든 의상을 만들어야 했다. 손나리 실장은 <모던보이>(감독 정지우, 2008), <고지전>(감독 장훈, 2011)으로 조상경 의상감독과 손발을 맞추며 보조 출연자가 많은 영화를 경험한 바 있다. 전체 의상 컨셉과 주요 배역의 옷은 조상경 의상감독이 진행하지만 조연, 보조 출연자의 의상은 대부분 실장들이 챙긴다. “<신세계>(감독 박훈정, 2012) 때 박훈정 감독님이 연변 출신의 거지 무리의 옷을 자꾸만 더 촌스럽게 만들어달라고 했다. 난 도저히 그 촌스러움을 모르겠더라. 손나리 실장이 해냈다. (웃음)” 전체 의상의 컨셉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만 다른 캐릭터나 무리의 의상을 균형감 있게 만들 수 있다. <암살> <밀정>처럼 상당한 보조 출연자가 나오는 강도 높은 노동 현장에선 전체 의상 톤을 유지하는 게 곧 실력이다. 그런 면에서 손나리 실장의 경험이 <암살>에서도 빛났다.
곽정애 실장은 손나리 실장과 함께 <친절한 금자씨>(감독 박찬욱, 2005)의 의상팀으로 일하며 조 상경 의상감독이 보조 출연자의 의상까지 모두 만드는 걸 직접 목격한 경우다. 영화에서 하나로 요구되는 톤을 맞춘다는 게 뭔지 안다. 거기에 조상경 감독은 곽정애 실장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높이 평했다. “내가 여러 편을 하다 보니 현장에 나가지 못한다. 나와 여러 번 작업한 <아가씨>(2016)의 박찬욱 감독님, <조선마술사>(2015)의 김대승 감독님 현장을 책임져줄 이로 곽정애 실장만 한 사람이 없다.” 경험이 적은 의상팀원은 노련한 배우들 앞에서 주눅들어 의상조차 제대로 못 만질 때가 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갖는 게 중요한데 그걸 곽정애 실장이 잘한다. “의상팀은 배우들에게 옷만 입혀주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의 컨디션까지 확인해 보듬는 감정노동까지 한다. 점점 더 경험자들이 현장에 가지 않는 상황에서 곽 실장 같은 인물이 중요하다. 현장 워드로브(의상 업무 중 준비한 옷을 현장에서 배우에게 잘 입히는 일에 초점이 있다.-편집자)가 중요한 일에 적역이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또래의 현장 스탭과 친해져라’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가 <달콤한 인생>(감독 김지운, 2005)으로 제작을 시작할 때부터 알고 지내 지금껏 일을 같이한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동료가 되는 거다.”
조상경 의상감독과 윤정희 실장은 시나리오를 받아두고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오랜 기간을 거치는 작품들을 함께해왔다. “윤 실장은 끈기 있고 책임감이 강하다. 짐 하나 흘리는 법도 없다. 후배들 입장에서는 깐깐한 선배일 수 있으나 나로서는 실수 없는 현장을 가능하게 해주니 그게 얼마나 큰가.” 윤정희 실장이 <신과 함께>를 맡게 된 것도 그래서다. 저승 세계가 배경이다보니 생경한 소재로 의상 제작을 여럿 시도했다. “윤 실장에게 책임지고 만들어달라고 한 소품이 있다. 대나무를 하나하나 엮은 조형물에 가까운 의상인데 몇달간 끙끙 앓더니 결국엔 해내더라.” 의상 색감 테스트도 계속됐다. “블랙도 먹색도 아닌 맑은 회색이 필요했다. ‘숯으로 염색해볼까?’라고 하니 윤 실장이 숯을 한 포대를 사와서 그날부터 바로 색 만들기에 돌입하더라.” ‘척하면 척’인 협력자가 든든할 수밖에. 조상경 의상감독이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뭘까. “나일론으로 만들었다고 누가 알까. (웃음) 하지만 옷은 1차적으로 배우와 만난다. 배우가 입었을 때 ‘저승의 인물이라면 이런 색의 옷을 입을 거야’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나. 옷이 연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조상경 스튜디오의 결정적 한수다.
독립적으로 일해야 협업할 수 있다
규모가 큰 상업영화의 시나리오는 조상경 같은 ‘빅 네임’의 의상감독에게 대부분 몰린다. 경험 많은 실장급이라도 규모 있는 데뷔작, 차기작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사극, 시대물은 더 그렇다. “내 스튜디오에 있는 팀원들조차 의상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상황에 대해 생각이 많은 눈치다. 영화의 규모에 상관없이 의상감독으로 데뷔해 전체 컨셉을 잡고 그 결과까지 책임진다는 게 뭔지를 경험해보는 게 중요하다. 데뷔 이후라도 여기 작업실은 같이 쓰되 서로 협업하자는 게 내 생각이다.” 협업은 조상경 스튜디오의 운영뿐 아니라 개별 의상감독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시나리오가 평균 크랭크인 4~5개월 전에 들어오나 길게는 1년 전, 짧게는 한달 전에도 받는다. 상당히 불규칙하다. 여러 편을 소화하는 내 경우가 예외적이다.” 수입 없이 작품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조상경 스튜디오는 적어도 팀장급 이하 직원들에게는 일이 끊이지 않게 스케줄을 안배한다. “의상실장이 한 작품 끝나고 조금이나마 쉴 수 있는 건 스튜디오 차원에서 여러 작품을 받아뒀기 때문이다. 물론 의상실장들이 있으니까 가능하다. 결국 팀원 관리를 해야 한다. 나만 생각하면 1년에 딱 세편만 해도 된다. 하지만 프리 프로덕션 때 들어오는 단기 팀원까지 포함해 30여명의 팀원이 있는 스튜디오를 운영하려면 그럴 수가 없다.” 팀원들에게는 월급제로 정기적인 수입 구조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지난해부터 중국쪽 제작사들로부터 협업 제안을 여러 차례 받고 있다. 의상감독 혼자 오돼 수입은 한국쪽보다 몇배로 주겠다는 달콤한 조건이다. 하지만 조상경 의상감독은 이런 콜이 반갑지만은 않다. “촬영, 조명, 미술 등의 기술 파트는 중국 작업이 가능하다. 하지만 옷 만들기는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방식이어야 한다. 게다가 현재의 스튜디오 구조라면 내가 한달을 비우고 중국에 가서 작업할 수 있는 스케줄이 안 난다. 팀원들이 좀더 독립적으로 일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일선에서 한발 떨어져 다른 방식의 작업을 모색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다 내 책임이어서 내가 빠질 수가 없다.”
조상경 스튜디오는 정기적으로 인력을 뽑는다. 면접에는 조상경 의상감독이 직접 참여한다. 현장 투입이 급해서 서둘러 팀원을 뽑은 경우, 얼마 못 가고 그만두는 일이 많았다. 사람만큼은 공을 들여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면접 통과 후, 제작과 현장 경험을 거치는 일종의 인턴 과정이 있다. “영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촬영이나 제작부는 연출이든 연극영화과든 영화 관련 교육을 받고 현장으로 가지만 영화미술, 의상쪽은 전문 교육이 없다. 대부분이 의류학과 전공자들인데 영화의상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 교육이 필요하다. 옷만 개다가 오더라도 한번 보라는 의미로 인턴을 현장에 보내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읽고 오디션장에 오는 지원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팀장급도 문제는 비슷하다. “의상팀장으로 10년 일했다는 데도 재봉틀 한번 안 써봤더라. 우리 스튜디오가 의상을 직접 제작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이런 상황을 두고 조상경 의상감독은 감독, 배우들뿐 아니라 의상팀원들까지도 워드로브가 의상 업무의 최우선이라는 인식이 문제라고 짐작한다. “코스튬 디자인과 워드로브는 별개다. 자신만의 코스튬 디자인을 구축하려면 의상팀 역시 수동적으로만 일해선 안 된다.”
시나리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조상경 의상감독과 함께 일한 감독들은 입을 모아 조상경 감독을 두고 “시나리오 이해, 캐릭터 분석이 탁월하다”고 한다. “시나리오, 연극 대본을 처음 읽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훈련의 결과다. 좋아서 찾아봤던 그림, 책, 이미지, 영화들이 자연스레 누적돼 이미지화되는 거다.” 종종 조상경 의상감독은 후배 팀원들에게 시나리오를 읽고 자료 조사와 내용 정리 표를 만들어오라고 한다. 결과는 대부분 만족스럽지 않다. “의심하지 않더라. 시나리오를 있는 그대로만 읽고 그대로만 준비해온다. 이미 연출부가 한 일이 아닌가.” 시나리오조차도 의심의 대상이다. 각본을 쓴 연출자도 잘못 알고 쓴 경우가 없을 리 없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땐 내용 위주로, 두 번째엔 옷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게 말이 될까?’를 생각하며 읽는다.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생각하다보면 분명 구현에 있어 ‘이상한’ 장면들이 나온다.” 의심 이후, 그 ‘이상한’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대안 제시까지가 그녀의 몫이다. “여러 상황별,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카테고리로 묶고 각각을 매핑(mapping)해보는 작업을 습관처럼 한다. 구력이 생기면 가능하나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도 해야 한다. 과거에는 ‘이 장면에, 이 옷 한벌!’ 이런 식이었다면 점점 더 변수들을 생각해 ‘이럴 땐 이런 의상으로, 저럴 땐 저 의상으로’라는 게 생기더라.”
조상경 의상감독은 영화계 안팎으로 의상팀 업무의 성격과 범위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재 의상팀은 현장에서 배우들의 옷을 챙기고 입히는 워드로브 업무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는다. 연출자뿐 아니라 투자•배급사, 제작사도 눈에 바로 띄는 현장 업무가 의상팀 일의 전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의상은 현장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선행되는 일의 양과 강도가 어머어마하다. 표준근로계약서도 현장 스탭을 기준으로 쓴다. 사극만 해도 관, 신발, 대, 저고리, 치마를 만드는 외부 인력이 다 다르다. 그걸 의상비 항목에 넣고 퉁 치자는 게 영화계의 관행이다. 할리우드는 전체 코스튬 디자이너, 주연배우별 워드로브, 스타일리스트, 데커레이터, 테일러 등 파트 분업이 확실하다. <아가씨> 크레딧에 의상 제작, 테일러, 구두 제작, 의상 바이어, 의상팀 지원 등을 다 챙겨넣었다. 크레딧 권한이 있는 제작사에 따로 요청을 하지 않으면 참여 인력 이름이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상 제작 및 감리, 외부 인력 관리까지 포함된 의상팀 업무가 축소 평가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전문 영화의상 제작 업체나 전문 봉제사, 패턴사가 재생산되지 않는 문제도 크다. “한국 방송 현장도 문제더라. 디자인실과 제작사가 분리돼 있다. 최저 단가 입찰제로 제작 업체를 뽑는다. 디자이너가 감리를 볼 수 없는 데다 옷이 만들어지면 현장으로 바로 투입된다. 우리 팀에선 절대 있을 수 없다. 1차로 옷을 내보낼 때도, 현장에서 팀원들이 마지막까지 신경쓰는 것도 옷에 간지 내기다.” <피도 눈물도 없이> 때부터 조상경 의상감독의 옷을 만든 이승덕 선생이 3년 전 조상경 스튜디오의 전담 의상 제작자로 들어온 것도 같은 이유다. “선생님이 은퇴하시면 나도 은퇴해야 하는 실정이다. 의상 창고 운영이 잘되고 있는 해외는 영화와 드라마의 의상 재활용도 잘된다. 한국영화의 의상 파트를 위해 투자•배급사에서 창고 하나 만들어주면 어떻겠나.”
의심이 만들어낸 빛나는 순간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의 웨딩드레스와 총
“시나리오상에는 안옥윤이 웨딩드레스에서 총을 꺼내 저격하는 설정이었다. 1930년대의 웨딩드레스 라인을 고려했을 때 도저히 옷 안에 총을 넣는 게 불가능했다. 기모노로 할까, 웨딩드레스로 할까도 고민했다. 드레스로 결정하고 당시 자료들을 뒤지다 커다란 부케를 발견했다. 최동훈 감독님에게 ‘부케에서 총을 꺼내자’고 제안했더니 굉장히 좋아하시더라. 시대나 의상 상황에 맞지 않은 설정은 과감히 ‘아니다’라고 말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밀정>의 이정출(송강호)의 블랙 가죽 재킷
“<밀정>은 1923년 무렵이 배경이고 이정출은 일본군이 아니라 일본 경찰이다. 그간 영화에서 익숙히 봐온 황토 빛깔의 군복이 아니라 블랙으로 가고 싶었다. 밤 신에서 검은색 덩어리로 인물들이 움직이는 느낌이 다를 것 같더라. 김지운 감독님은 일본 경찰 무리에서 이정출이 튀어나오길 바라셨다. 간도참변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총살하는 흑백 사진을 봤다. 그 일본 경찰의 실루엣과 옷의 질감이 울코트나 군복에 많이 쓰이는 개버딘, 아마, 낙타가 아니었다. 가죽 같더라. 이정출에게 가죽 재킷을 입히고 싶으니까 우기는 건데. (웃음) 그런 게 필요하다.”
아주 작은 차이가 시대의 뉘앙스를 만든다, <아가씨> <밀정>의 신사복
“시대극은 실루엣이 중요하다. 1920, 30년대 신사복은 다트(dart, 평면적인 천을 입체적인 인체에 맞추기 위해 옷의 일정 부분을 걷어잡아 줄인다.-편집자) 없이 몸에 붙여 재단한다. 현대의 옷보다는 헐렁해 보이나 실제로는 몸에 맞춘 거다. <아가씨>의 백작(하정우)의 슈트는 여름이라는 계절감에 맞춰 리넨을 썼다. 습도 높은 일본의 여름 촬영으로 민감한 리넨이 우글거렸다. <밀정>은 겨울 배경이라 100% 캐시미어 코트를 썼다. 상하이 왕래가 잦은 의열단이다보니 폴로, 체스터 코트 같은 영국 신사들의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나 더. <밀정>의 김우진(공유)은 1910, 20년대 많이 쓴 뉴스보이 캡(newsboy cap)을, 1930, 40년대에 등장한 페도라는 <암살>과 <아가씨>에 넣었다. 약간의 차이지만 이런 게 시대의 뉘앙스를 만든다.”
한벌 한벌이 다 이야깃거리, <아가씨> 의상의 비밀
“숙희(김태리)가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입은 환자복은 광목 소재다. 당시 정신병원을 기록한 흑백 다큐멘터리를 보다 유카타 형식의 환자복이 눈에 띄었다. 광목의 자연스러운 구김이 좋더라. 사실 광목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원단이라 나는 웬만해선 사극에 광목을 안 쓴다. 히데코(김민희)가 백작과 거짓 초야를 보낸 다음날 아침에 입은 옷도 마음에 든다. 교토에서 구입한 원단이다. 알고보니 일본에서는 초야 뒤에 매화꽃이 폈다며 꽃 문양의 옷을 입는다 하더라. <아가씨>는 같은 장면이라도 1, 2부의 그림이 조금씩 다르다. 히데코가 첫 등장했을 때 입은 유카타를 유심히 보라. 1부는 숙희 시점이라 인디 핑크 톤으로 얌전한 느낌이지만 히데코의 시점인 2부에서는 같은 옷인데도 선명한 코랄빛이다. <아가씨>의 옷에는 이런 비밀들이 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