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거인이 아니다
극장 앞에서 새미는 겁을 먹고 있다. 그런 아이를 두고 미치(미셸 윌리엄스)와 버트(폴 다노)는 양쪽에서 열심히 강변한다. “영화는 꿈과 같은 거야.” 그러나 아직 어린 새미는 이 “거인”의 세계가 두렵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에서 기차가 실시간으로 육박해오는 듯한 실감이 관객에게 충격을 주었다면, <파벨만스>의 새미는 자신보다 큰 것, 높은 것, 그래서 올려다봐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영화에 불안을 느낀다. 여기에는 작은 몸으로 맞은편의 (영화 속) 어른들을 올려다봐야 하는 구도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다. 현대로 오며 극장의 상영/관람 형태와 규모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일반적으로 관객은 극장에서 영화를 올려다본다. 일단 앉아야 하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면 <파벨만스>는 무릎을 꿇고 마주 앉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기입한다).
극장은 고정된 중심인 스크린이 일방적으로 이미지를 방사하는 공간으로, 꼭대기에서 연주자를 내려다보는 배치가 가능한 공연장이나 선 채로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장과는 다르다. 스필버그는 이 물리적 조건을, 영화와 처음 만난 아이의 입장에서 정서적 자극을 증폭하는 기제로 사용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밀고 나가자면,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이야기가 우리 ‘위에서’ 펼쳐지길 기대하게 되지 않던가? 개인이 통제할 수 없고 시선이 가닿을 수도 없는 모종의 영역이 저기 위 어디쯤 있음을 상상하며, 거기서 불거진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언가 건네주리라고 예상하면서. 하여간 그 (불)완전한 지위에 대한 경외로 작동되는 공간이 극장이(었)다.
이렇듯 <파벨만스>의 오프닝에서는 설령 으스스한 것이더라도 대면하고픈 역설적인 욕망이 드러난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만지작거리고 싶을 만큼 황홀하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그래서 새미는 모두가 잠든 새벽에 기어코 레일 위의 장난감 기차를 충돌시킨다. 그런데 충돌과 연계된 스펙터클을 묘사하는 지점에서 <파벨만스>는 어른-미치와 소년-새미의 세계를 양분한다. 새미는 장난감 기차와 미니 자동차를 여러 번 들이받을 수 있지만, 미치에게 이와 같은 기회는 실제 재난 현장에서 벌어지기에 무력감을 안긴다. 토네이도 시퀀스에서 미치는 막내를 버트에게 맡긴 채 다른 자식들을 차에 싣고 달린다. 뭔가에 홀린 듯 보이는 이 질주는 위험천만하다. 그럼에도 꽤 신나 있던 미치는, 자신의 차 맞은편에 수십개의 카트들이 비바람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제야 운전을 멈춘다. 미치는 충돌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뒤에 아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아이인 새미는 무언가 충돌시킬 수 있는 주인의 손을 갖는 반면 미치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무너진다. (<파벨만스>에서 인물들이 운전할 때면 조수석에 탑승한 이가 “앞에 봐”(Watch the road)라고 말하는 것은 초반부에 징후적으로 새겨진 충돌에 대한 불안 탓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파벨만스>의 제목은 모든 식구들을 포괄하는 이름이지만, 결국 그 ‘파벨만스’에서 미치가 이탈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매우 아이러니한 단어가 된다. 보리스 할아버지의 일화가 일러주듯, 새미가 영화와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찢겨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파벨만스>는 새미와 미치를 통해 가족 내부에 예견된 분열의 징조는 물론, 무엇보다 아이와 어른에게 각기 다르게 매겨진 현재의 무게를 시사한다. 다 자라지 않았을 때만 수용 가능한 충돌이 있다는 점 말이다.
빚의 손, 빛의 손
한편 <파벨만스>의 종장에 다다르면 나는 스필버그가 영화에 부정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첫 장면에서 새미를 향해 영화에 관한 명제들을 열거하는 들뜬 부모의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이. 새미가 청소년기를 통과하며 연출한 영화들, 즉 서부극을 비롯해 캠핑영화, 베니(세스 로건)와 미치만 따로 떼어놓은 편집본, 졸업 기념 영상 등은 그의 손에서 빚어졌음에도 명쾌한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 새미의 성장은 영화라는 총체를 단번에 설명하기에는 많은 부분이 누락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체험의 여정이다. 물론 <파벨만스>는 영화의 위력이 발휘되는 가능성이나 그것의 매혹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과정을 거쳐 도달되는 영화를 온전한 포용과 화합의 예술이라고 일컫지만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식구들은 새미의 작업에 지지를 보내고 노동력 또한 보태지만 결과물에 관한 한 공동의 권리를 위임받지 못한다. 영화를 향한 찬사도 비판도 전부 새미의 것이며 이 점에서 영화 작업은 민주적이지도 개방적이지도 않다. 그리하여 <파벨만스>는 영화와 연루된 상황들 틈으로 발생하는 ‘흔적들’을 에두르면서, 영화를 좇는 일이 아무리 타자들과 함께하더라도 철저히 혼자로 좁혀지는 절차임을 드러낸다. 이는 오로지 주체만이 감각 가능한 물리적 고통의 흔적들로 위시된다. 미치에게 얻어맞아 등에 각인된 손자국, 채드의 주먹이 남긴 혈흔과 보리스 할아버지가 이 순간만은 기억하라며 볼을 잡아당길 때의 따가운 통증처럼.
그러고 보면 영화를 만드는 행위 또한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하는 일이다. 또 한번 초반부의 어느 장면이 떠오른다. 파벨만스 부인은 며느리인 미치에게 플라스틱 포크를 쓴다며 타박한다. 피아니스트인 미치는 설거지를 하지 않기 위해 일회용 접시와 식기를 쓰며 식사가 끝나면 이 모든 것을 비닐에 쓸어버린다. 식구들이 비닐 속으로 쓰레기를 던지는 숏 직후에는 새미의 첫 영화가 재생되는 숏이 맞붙는다. 어린 새미는 제 손바닥을 펼쳐 거기 반사된 화면을 비춰 본다. 쓰레기를 던지는 손들과 빛이 명멸하는 아이의 손. 이 의미심장한 장면의 배열에는 (아직 손이 더럽혀지지 않은) 새미의 꿈이 어디에 빚을 지고 자라는지 엿보인다.
필름을 훼손하자 영화가 새로워졌듯, 끊임없이 자르고 이어 붙여야 하는 영화란 애초부터 손을 번거롭게 움직이고 자주 더럽혀야 하는 것이다(물론 이는 단순히 물리적 행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낱장의 사진들이 ‘활동’하기 위해 동원되는 몽타주의 절차도 지시한다). 그래서일까, <파벨만스>에는 물려받거나, 베끼거나, 공짜로 얻으면서 지속된 영화에 대한 은밀한 죄책감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스필버그는 지금 영화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하느라 불가피하게 파괴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고 여동생들이 울고 소리칠 때 새미는 이들과 약간 떨어져 계단참에 앉아 있다. 그 순간 맞은편에 카메라를 들고 이 상황을 촬영하는 자신의 환상이 보인다. 내가 카메라를 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사랑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미치에게 그 영화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궁극적으로 소년의 영화 작업은 가족의 와해에 가담하게 된 셈이다. <파벨만스>는 그것의 매혹에 어김없이 항복하면서도 동시에 질문한다. 정녕 영화 ‘하는’ 손은 바람직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