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난 (그 작품의 국내 개봉 시기를 찾아보니) 6살이었다. 우리 가족과 외갓집 식구들까지 적어도 예닐곱명이 작정하고 극장으로 향했던 날,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신흥동 ‘성남극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모들과 삼촌들은 곧 보게 될 영화에 대한 소문을 나누었고, 어마어마하게 길었던 매표소 줄 속에서 아빠는 누가 새치기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표를 사고 계단을 올라 상영관의 두꺼운 문이 열리자, 시커먼 어둠과 커다란 소리가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영화는 한참 전에 시작되었고, 앉을 자리는 없었다. 관객은 이미 계단과 스크린 앞, 객석 뒤 공간까지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했고, 담배 연기 자욱한 화면은 어른들 등에 가려 반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화면을 잘 보려고 자리를 옮기는 산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신경질이 나려던 그 순간, 화면 속 무언가를 본 엄마가 얼른 나를 잡아채 어른들 틈으로 억지로 쑤셔넣어 앞으로 보냈다. 그제야 비로소 온전히 보이는 그 스크린 속에서 E.T의 둥그런 얼굴이 그 주름진 목을 길게 늘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때 나는 뇌에 약간의 화상을 입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종이에 E.T만 그렸으니까. 자막을 못 읽어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괴물 친구의 커다란 눈과 미소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꼬마들, 가족, 동네 친구들, 자전거, 모험, 괴물…. 고백하자면 나에게 스티븐 스필버그란 아직도 이런 것이다. 예전 영화들이 더 좋다는 것이 아니라, 어렸던 나에게 문신처럼 새겨져 이제 지울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의 작품들이 차가워지기 전, 2000년대 이전 그의 작품들에는 ‘가족’이 있었다. 스필버그의 초기 작품에서 가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따분한 일이 없겠지만, 내가 아는 그의 위대함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고, 또한 그것이 그가 낭만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생각하기에 지금 다시 꺼내려 한다. 그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고통의 근원이나 방해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무결한 존재도 아니고, 적으로부터 지켜야 할 제1의 가치도 아니다.
1980~90년대 그의 작품 속에는 악당을 모두 해치운 후 피투성이로 홀로 서서 박수받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브루스 윌리스가 없다. <미지와의 조우>의 로이는 UFO에 미쳐서 가족을 내팽개치고, 떠나려는 가족을 붙잡지도 않는다. <E.T.>의 엘리엇의 아빠는 어디서 뭘 하는지 존재 자체가 흐리다. 스필버그의 영화에서는 믿음직스러운 아버지는커녕 문제를 해결하는 초인적인 남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죠스>의 멋진 바다 사나이 퀸트도 온갖 폼을 잡았지만 (물론 멋있었지만) 하반신이 상어에게 물린 채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스필버그가 그린 가장은 식구들을 나의 울타리 안 지켜내야 할 존재로 여기지 않고, 그럴 능력이 있을지도 의심스러우며, 식구들조차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빠만 못난 게 아니다. 다른 가족들도 괴팍하거나 못되고 때때로 서로를 증오한다. <슈가랜드 특급>의 철딱서니 없는 진 루는 남편에게 탈옥을 권유하고,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엄마 폴라는 아들을 버리고 남편의 친구에게 가버렸으며, 'A.I.'의 모니카는 ‘자식’을 숲속에 홀로 두고 도망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가진 결함이 그저 개성 있는 인물 묘사를 위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가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들은 결코 ‘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구할 수 없고, 그들도 나를 구할 수 없다. 나와 가족들은 모두 영웅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결함과 어둠은 그들이 아빠나 엄마이기 전에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단서이며, 스토리 속 인물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 자체가 된다. 클로비스가 아이를 되찾기 어려운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수감자라는 본인의 신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의 인물들은 가족을 향해 움직인다. 나도 그들도 모두 완벽하지 않아도, 그래도 저녁이 되면 우린 집에서 다시 모인다. 부모의 자격이 의심스러운 진 루와 클로비스는 아이를 되찾기 위해 감옥을 뛰쳐나왔고, 엘리엇과 친구들은 E.T를 가족에게 데려다주려고 숲속을 달렸으며, 전쟁이라는 지옥의 끝에서 미쳐버린 제이미는 결국 다시 부모 앞에 섰다. 8명의 병사들은 라이언 일병을 어머니에게 돌려보내려다가 차례대로 모두 죽었고, 인디는 결국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에서 가정을 저버린 아버지와 화해했다. 그리고 데이빗은… 이름만 불러도 목메는 사랑스러운 데이빗은 수천년 동안 얼음 속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그래도 만나게 해달라고 요정에게 빌고 또 빌었다. 소원은 이루어져 엄마를 다시 만나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엄마 품에 잠들었다. 그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려고 정말 길고 긴 여행을 해온 것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까? 난 1980~90년대 그의 작품들에서 냉전의 공포나 히스테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구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기에, 그 시절 그의 연출작을 모두 다 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는 외부의 적보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당시 그의 영화들은 경이로운 실적을 거두었고, 그는 가장 상업적이고 미국적인 감독이며, 아직까지도 어마어마한 출력을 자랑하지만, 묘하게도 그는 다 때려부수는 영웅이나 모두가 우러러보는 하늘 위 망토에는 (적어도 본인 연출작에서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돌려보내기 위해 모험했다. 그들을 지키려 하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고통을 감내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집은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낙원이 아니다. 그의 작품 속 그 누구도 집으로 돌아갔다고 구원받지는 않았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프랭크는 긴 범죄 행각 끝에 잡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는 이미 남의 어머니가 되었고, 다가가 말조차 걸 수 없는 창 너머의 타인이 되어버렸다. <태양의 제국>의 제이미가 부모를 다시 만났다고 한들 앞으로 행복할까? 행복은커녕 과연 정신이 온전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까? 나에겐, 스필버그가 그린 가족들이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다.
난 어머니, 아버지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던 듯하다. 완벽하지 않은 그들이 원망스러웠으며, 그들의 약점과 실수가 날 방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나와 같은 욕망과 어둠을 가졌을 리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실제로 아버지의 친구를 선택하며 자신을 떠난 어머니를 받아들였다. 포르노 배우가 된 딸도 인정했다. 나의 가족을, 나와 다른 동시에 다를 바 없는 개별적 인간으로 인정하고, 그의 인생을 응원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가족은 날 구하지 못해도, 난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구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수십년 전, 지구 반대편 달동네에 살던 나의 가족들을 눈물짓게 했다. 마치 명절 제사상처럼 우리 식구들을 극장으로, <토요명화> 앞으로 불러모았고, 같은 감정을 나누게 만들었다. 그는 아직도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이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는 영원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탱해준 것이, 나는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