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껏 카메라에 담고 보니 어느새 영화가 되어 있다. <지난 여름>은 제목 그대로 가뭄으로 시작해 장마로 이어졌던 지난여름을 되돌아본다. 벼를 심고 논에 물을 대고 나락이 익어가는 한 계절을 담담하게 따라가는 동안 사건이라 부를 만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설사 일어나더라도 도도히 흐르는 시간의 강물처럼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어떨 땐 가뭄으로 비가 내리지 않다가 어느새 너무 많이 내려 범람하기도 한다. 사람이 날씨를 바꿀 수 없듯이 인물들이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조건에 맞춰 순응하고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날씨가 따라주지 않아도, 속이 답답해도, 죽음과 이별 앞에 마음이 미어져도 오늘 할 일을 하는 것. <지난 여름>은 시간 앞에 순리대로 존재하는 이들의 존재를 정중하고 맑은 시선으로 담아낸다. 스크린엔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은 영화의 시간이 흐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든 최승우 감독은 정규 과정으로 영화를 배워본 적이 없다. 취미로 시작한 영화 보는 일이 어느새 꿈이 되어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 것이 25살 무렵, 이후 7년 동안 독학으로 영화와 마주해왔다. “주변에서 왜 영화학교를 가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일단 학교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 조직이나 정해진 틀을 못 견디는 편이다. 그냥 돈을 모아 카메라를 사고 무작정 찍기 시작했다. 찍다보니 조명도 필요하고 배우도 필요하고, 그렇게 점점 확장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최승우 감독의 작업방식은 애초에 틀이 없으니 상황을 포착하고 화면에 담는 방법도 정해진 것이 없다. 때론 찍고 싶은 것부터 찍고, 때론 사람으로 시작하거나 시나리오를 따로 쓰지 않고 장소부터 찾아가기도 한다.
<지난 여름> 역시 그러한 우연 같은 필연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밥은 그냥 매끼 먹는 건데 어느 날 문득 이 밥과 쌀이 어디서 왔는지 의식하게 됐다. 쌀을 지은 농부의 심경이 궁금해졌고 무작정 농촌을 찾아가서 돌아다니다가 홍천에서 어르신들을 만났다. 거기서 픽션으로 최소한의 인물들을 세우고 한 계절 동안의 시간을 담아야겠다고 결정했다. 이후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화면에 담을 순간들을 기다렸다. 동사무소에 다니는 민우(김민혁)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픽션, 농촌에 계신 분들을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 그리고 농촌의 장소와 시간을 찍는 파트를 각각 따로 담았다.” <지난 여름>의 구성은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세 가지 다른 결의 파트는 서로 섞이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와 차이밍량, 특히 페드로 코스타 감독을 좋아한다는 최승우 감독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서사영화보다 장소, 특히 시간을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여러 기관의 지원금을 받아서 찍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시나리오와 기획 아이템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현재의 시스템에선 불가능했다. 내 안의 심상을 글로 옮기는 데 익숙하지 않다. 지금까진 돈을 모아 나만의 방식으로 내면을 표현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가능할진 모르겠다. 이제는 나만을 위한 게 아닌 모두와 함께하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영화들을 고민하려 한다.” 정해진 시스템 바깥에서 귀한 싹을 틔운 새로운 영화적 에너지, 때 묻지 않은 영화언어가 어떤 색으로 익어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