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 펭귄클래식 코리아 펴냄
<모피를 입은 비너스> Venus in Fur
감독 로만 폴란스키 / 출연 에마뉘엘 세이그너, 루이 가렐 / 미국 개봉 2013년
“거기엔 삼손이 델릴라의 발치에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눈이 파내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 순간에 그 그림은 내겐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남자가 여자에게 갖는 열정과 욕망과 사랑의 영원한 비유 같았다. ‘우리는 누구나 결국에 가서는 삼손처럼 되는 거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영화화하는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프의 1870년작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어떤 사랑 이야기다. 주인공으로 내정된 배우는 에마뉘엘 세이그너로, 그녀는 1989년 폴란스키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하지만 데이비드 아이브스의 희곡으로 옮겨져 2012년 토니상을 수상한 연극 <모피를 입은 비너스> 역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화에 결정적인데, 자허마조흐와 아이브스의 작품 사이에는 제목상의 미묘한 차이 ‘s’가 있으며(자허마조흐의 소설의 영어판 제목은 ‘Venus in Furs’이고, 아이브스의 희곡은 ‘Venusin Fur’다), 시대와 상황이 서로 다르다. 원작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스물다섯의 청년 제베린 폰 쿠지엠스키는 반다 폰 두나예프라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홀린다. 그녀는 그에게서 결혼 대신 완벽한 복종을 요구한다. 제베린은 반다에게 속박된 노예로서의 삶을 받아들인다. 아이브스의 희곡에서는 시대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녀, 반다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배우인데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연극을 준비 중인 토마스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맡고 싶어 한다.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이지만 까다롭기 그지없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토마스의 오디션은 결국 소설처럼 권력과 섹스, 유혹이 질펀한 기묘한 오디션이 된다. 감독인 남편, 배우인 아내가 영화로 만드는 <모피를 입은 비너스>이다보니 원작 소설과 희곡 중 어느 쪽에 무게중심이 갈지가 관심사. 게다가 로만 폴란스키는 얼마 전, <대학살의 신>을 연극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완벽하게 옮겨내지 않았던가. <인디와이어>의 보도에 따르면 데이비드 아이브스가 로만 폴란스키와 공동으로 각본을 쓰고, <혐오> <비터 문> 등 폴란스키 영화를 비롯해 <잠수종과 나비> 등에 출연한 에마뉘엘 세이그너와 <몽상가들> <러브 송> 등에 출연한 루이 가렐이 출연을 결정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영화화가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원작 소설이 마조히즘이라는 명명이 있기 전에 쓰였으며(그 때문에 이후 자허마조흐는 성도착증의 대명사 격으로 취급당한 데 대해 불쾌해했다고 한다), 할리퀸 로맨스식 BDSM(결박(bondage), 훈육(discipline), 그리고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으로 전세계를 평정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증조할아버지 격인 동시에 지배자가 여자라는 특이성을 지녔고, 어디까지나 자허마조흐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이야기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노래한 <Venus in Furs>와 이미 여러 차례 만들어진 <모피를 입은 비너스>들과 다른 폴란스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남을 희생해서라도 쾌락을 즐기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돼요”라고 단언하는 여자의 모습은 어떻게 현대에서 부활할까.
혹여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아이브스의 희곡을 그대로 영화화하는 시도가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형식적으로 <대학살의 신>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자허마조흐의 표현을 빌리면 ‘백합정원의 곰’처럼, 도망칠 수 있는데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유를 주겠다는 말에 위협을 느끼며 모든 것을 참아내는 남자의 모습이 아이브스의 희곡을 관통해 영화로 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살아남을까. 자허마조흐와 폴란스키의 교차점이 궁금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