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한국영화 1. 아가씨
의외의 결과다. <아가씨>가 압도적인 지지 속에 1위를 차지한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올해의 영화 1위를 차지한 것이 처음이란 사실이 새삼 놀랍다. 복수 3부작의 문을 연 2002년 <복수는 나의 것>은 3위였고, 칸의 영광을 차지한 2003년 <올드보이>는 5위에 그쳤다. 심지어 올해의 감독에 김지운, 봉준호 감독은 있었지만 박찬욱의 이름은 없었다. 박찬욱 감독이 한국영화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씨네21>이 유독 그의 영화에 박한 평가를 내렸다 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올해는 박찬욱, 그리고 <아가씨>의 해다. 한국영화 1위는 물론 올해의 감독, 올해의 여자배우, 올해의 제작자, 올해의 촬영, 올해의 신인 여자배우까지 모조리 차지했다. 그야말로 “정밀하고도 대담한 박찬욱의 두 번째 정점”(김혜리)이라 부를 만하다. 평자들의 찬사는 주로 상업영화의 문법을 넓힌 감독의 예민한 감각에 쏟아졌다. “박찬욱 감독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이자 올곧게 승리를 지향하는 밀도 있고 단단한 영화”(이예지)는 금기와 장벽을 넘어 “퀴어 장르의 기념비적인 한국 대중영화 진입”(장영엽)을 이뤄냈다. 그 결과 “한국 상업영화 안에서 이야기의 지평, 캐릭터의 지평, 미장센의 지평을 넓혀준 작품”(이주현)으로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동시에 이끌어낸 것이다. 동시에 “기실 매우 황량하고 혐오스러운 제국주의적 무의식을 황홀한 비주얼로 포장해놓은 역설의 힘”(송효정)은 단순히 미학적인 탐닉을 넘어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이 영화에 대한 의견은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시시각각 바뀐다. 그만큼 불균질한 영화고 그래서 아름답고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올해 나온 한국영화 중 가장 재미있고 이야기하기 즐거운 작품”(듀나)이다. 뒤늦은 찬사를 뒤로한 채 “상업적 작가주의의 장엄한 행보”(김영진)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
올해의 한국영화 2. 곡성
“영화적 에너지의 총합.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이화정) <곡성>을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이 영화의 강렬함을 외면하긴 어렵다. 영화에 대한 찬사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대다수의 평자들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강렬한 감정들”(이주현), “전세계를 통틀어 올해 만들어진 가장 강렬한 집념의 작품”(이지현) 등 가슴을 뒤흔드는 폭발력에 주목했다. 이만큼 들끓는 에너지로 관객을 현혹시킨 영화도 드물다는 평이다. 한편으론 이를 성취한 나홍진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에 대한 상찬도 이어졌다. “전례를 찾기 힘든 토종 오컬트 무비”(황진미), “일상의 인식 한계를 넘도록 돕는 상징주의와 이를 잇는 아교 같은 플롯, 갈수록 깊어지는 나홍진의 영화세상을 누리는 기쁨”(송형국), “인물의 감정이나 장르의 감성이 아닌 연출자로서의 목표치가 확실히 느껴진다. 연출된 분노와 계산된 기교의 높은 완성도”(이지현), “영화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관객과 게임을 벌인다”(김현수) 등의 평가에 귀 기울여볼 만하다. 단지 정념이 넘치는 작품이 아니라 정교하게 통제된 완성품이라는 설명이다. “(미스터리에서 오컬트 판타지로) 한국영화 장르의 흐름을 뒤바꾸어놓을 징후적 방아쇠가 될 작품”(송효정)이 탄생했다.
올해의 한국영화 3. 비밀은 없다
새롭다. <비밀은 없다>는 천편일률적으로 평준화되고 있는 한국 기획영화에 감독의 개성이 왜 중요한지 증명한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버와 언더를, 냉혹한 합리와 신비주의적 무속을 마구 뒤섞어 경험해보지 못한 장르를 만들어냈다”(송효정)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한국 스릴러의 많은 관성을 찢어버리고, 자매애와 모성애의 틀마저 구겨버리고, 그 틈으로 억압된 것들을 복권시킨 붉은 비명 같은 영화”(김혜리)의 등장에 평자들도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그렇게 이경미 감독은 전작에 이어 자신의 온전한 목소리를 높이며 장르를, 아니 영화를 창조했다. “여혐이 불거진 이 사회를 향한 날선 경고. 그냥 이대로 지나갈 순 없다”(이화정) 등 사회의 여러 지점들을 날카롭게 건드리고 있는 이 영화에 시의성에 주목한 평가도 이어졌다. “학원폭력, 부르주아지의 허위의식, 정치권력의 치졸함, 중산층 가정의 천박한 가족사 등 현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문제적 요소들의 종합선물세트”(김지미)라는 설명. 동시에 “불균질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집요한 작품”(이예지)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 영화가 더 많은 대중과 만나지 못한 것일까.”(김지미)
올해의 한국영화 4. 아수라
“소신과 취향을 밀어붙인 작가적 고집이 돋보인다”(김태훈), “김성수 감독이 거의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쏟아냈다”(김성훈). 대중성이란 이름으로 타협하기 쉬운 상업영화판에서 <아수라>는 “단 한번의 흔들림 없이 끝까지 밀어붙인”(이화정) 감독의 의지와 결기를 확인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결과물이다. “조명, 촬영, 장면구성 등 지금껏 보지 못했던 스타일과 완성도”(황진미)는 기본이다. 김성수 감독의 장르적 성취는 애초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흥미로운 건 “영화의 정치성이 대단히 급진적”(황진미)이란 의견처럼 영화가 완성한 폭력의 지옥도가 상징하는 바에 주목한 평자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폭력과 죽음 앞에 평등한 <아수라>의 세계는 “총체적 부정을 통한 의지적 긍정”(김영진)으로 나아가는 의지의 발로이며 김성수 감독이 현재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상식이 무너진 세상에 이런 영화도 필요하다”(김성훈)는 평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엇보다 “현역감독 중 최고참급이라 할 김성수 감독이 가장 도발적이면서도 가장 실험적인 장르영화로 돌아왔다”(주성철)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영화적 흥분과 과잉으로 점철된 최고의 폭력영화”는 “당대 한국영화계 장르영화의 극점”(주성철)에 서서 동료, 후배영화인들에게 끊임없는 자극을 선사한다.
올해의 한국영화 5. 우리들
일상에서 발견한 보석, 아니 올해 한국영화가 건져올린 빛나는 성과다. 신인감독이라 믿기 힘든 안정된 연출이 <우리들>을 지지한 평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 영화는 “일상의 극적 순간과 인물들의 보편타당한 감정을 유영하면서 우리들의 지난날과 현재를 되돌아보게 한다”(이주현). <우리들>을 수식하는 말 중 유독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사려 깊음, 섬세함, 신중함 등인데, “화면 밖 사운드와 이에 리액션하는 얼굴을 집중력 있게 담아낸 성취는 물론이고 놀라운 관찰력, 인간애 빛나는 대사 등 이 영화를 이루는 모든 입자들이 사랑스럽다”(송형국).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마냥 따스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올해의 호러영화. 속살을 저며내는 것처럼 정확하게 잔인한 영화”(듀나)이기도 하다. “과장이나 미화 없이 담담한 화법으로 담아냈지만 그 속에 있는 건 가장 진지하고 치열한 멜로드라마”(이예지)인 셈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담아낸 솜씨도 놀랍지만 그보다 믿음직한 건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카메라다. “시선과 몸짓은 섬세하지만 복잡하지 않고, 솔직하고 직관적이지만 모나지 않았다.”(윤혜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영화는 그렇게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