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총천연색이 난무하도록’, <세기말의 사랑>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4-12-06
글 : 박수용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제4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하 영평상) 촬영상의 주인은 <세기말의 사랑>의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이다. 그는 다큐멘터리와 미디어아트의 영역까지 종횡무진하는 팔방미인이자 길 위에서 끝없는 배움을 찾는 여행자이며 심지어 여행 산문 두권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더 값진 경험을 위한 여행의 기술을 슬그머니 묻자 그는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구분 짓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질적인 영상 장르의 문법도, 여행자와 촬영감독의 삶도 그는 구획이 아닌 통섭의 관계로 인식한다. 세계를 갈라놓는 것만 같던 <세기말의 사랑>의 흑백과 컬러, 그 경계를 자신으로서 유유히 횡단하던 영미(이유영)의 모습처럼.

- <세기말의 사랑>으로 제44회 영평상 촬영상을 받았다.

평소 주변 영화인들에게 아쉬운 결과에 너무 슬퍼하지도, 그렇다고 수상에 너무 크게 기뻐하지도 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이번 상을 받았을 때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웃음)

- ‘로드리고’라는 미들 네임은 수평적인 소통을 위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국어 호칭 중에 위계를 포함하지 않는 단어가 하나도 없더라. 그런 언어가 만드는 사유 체계 안에 함몰되어 있으니 수직적 질서가 자리 잡는 것 같았다. 영화는 공동 작업이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한국어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외국어 이름을 가져다 썼다. 로드리고는 남미에서 ‘철수’쯤 되는 흔한 이름이다.

- 촬영감독이 되고자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

고등학생 때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을 즐겼다. <초록물고기>와 <8월의 크리스마스>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몇번이고 다시 보다 보니 왜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는지 문득 느껴지는 지점이 생기더라. 처음으로 스크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느낀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꿈이 화가이기도 해서 촬영이 관계되는 시각적 요소에 더욱 끌렸던 것 같다.

- 드라마 <아다마스>, 여러 다큐멘터리와 미디어아트 등 다방면의 영상 예술에 능하다. 최근에는 해양 다큐멘터리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그린피스와 협업한 작품으로 세계 곳곳의 바다를 지키는 사람들을 담았다. 장르마다 요구되는 작업 방식이 무척 다른 것은 사실이다. 분명 어렵지만 여러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삶의 모토인 만큼 큰 기쁨으로도 다가온다. 다큐멘터리는 팀의 규모가 작아야 하기에 대부분 홀로 카메라를 운용하게 된다. 스스로 렌즈를 갈아 끼우고 초점을 맞추고 녹화 버튼을 누르는 일련의 과정이 카메라와 온전히 독대하는 순수하고 정직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미디어아트는 그간 내가 갖고 있던 촬영에 대한 상식이나 신념을 완전히 리셋한 채로 접근해야 한다. 나를 비워낼 수 있는 좋은 계기다.

- <세기말의 사랑>은 <69세>에 이은 임선애 감독과의 두 번째 작업이다.

미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임선애 감독과는 비주얼적인 감수성이 정말 잘 통한다. 영화 외의 교양이 무척 풍부하다. 둘이 영화를 준비할 때는 영상으로 된 레퍼런스가 거의 없고 주로 각자 가져온 사진으로 대화한다.

- 주로 어떤 종류의 사진인가. 구체적인 레퍼런스인가, 인상을 자극하는 추상적인 이미지인가.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용도가 대부분이다.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출발했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도달하기도 한다. 사진은 각자의 머릿속에 심는 씨앗이고 대화는 함께 물을 주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다. 즉물적인 이미지를 선호하는 다른 작업도 좋지만, 임선애 감독은 더 추상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들을 동원한 풍부한 대화를 나누며 이미지의 나무를 가꾸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파트너다.

- <세기말의 사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각적 요소는 흑백으로 진행되는 1막과 영미의 출소와 함께 컬러로 펼쳐지는 이후의 대비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둘 다 꼭 1막을 흑백으로 해야 할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흑백으로 해야만 한다는 확신이 서로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심지어 임선애 감독은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흑백의 선택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 1막에서는 비교적 정적이었던 카메라가 2막에 들어서자 빠른 줌과 아크 등의 다양한 움직임을 자유로이 구사한다. 마치 촬영의 변속기를 당긴 듯한 느낌이다.

카메라워크의 변화는 명백하게 인물의 심경 변화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1막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영미를 마찬가지의 거리감을 둔 채 바라보고자 했다. 코너에 몰린 듯한 상황을 시각화하기 위해 영미는 언제나 프레임의 귀퉁이에 걸려 있고 도영(노재원)의 오버더숄더숏에서도 화면 중간에 자리하지 못한다. 이후부터는 카메라가 인물과 더 가까이에서 밀착하며 그들의 모습을 주관적인 시선에서 담고자 했다. 결국 이 영화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세상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이라도 영미의 삶에서는 영미가, 유진(임선우)의 삶에서는 유진이 온전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 영화 중반부 영미가 사촌오빠의 노래방으로 찾아가는 장면의 촬영이 궁금하다. 인물들의 얼굴에 형형색색의 간판 불빛이 일렁인다.

총천연색이 난무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었다. 로케이션부터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조금은 촌스러운 거리였다. 그 광원의 색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조명팀에서 색채를 조절하는 젤라틴 필터를 수십개씩 갖다 붙였다. 카메라도 통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색온도로 설정했다.

- <69세>와 촬영의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69세>는 전경의 인물부터 후경의 거리 모습까지 또렷이 잡히는 롱숏이 많다. 반면 <세기말의 사랑>은 대부분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 클로즈업 위주이고 후경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69세>는 주인공이 겪은 참혹한 일이 구경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스펙터클을 거부하고자 했고 촬영의 주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장식적이지 않은 화면을 구사하기 위해 광각렌즈를 끼우고 조리개를 더 조여서 심도를 깊게 가져갔다. <세기말의 사랑>은 2000년경의 풍경을 재현해야 한다는 프로덕션상의 제약으로 롱숏을 자제한 측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카메라의 선택에도 변화를 줬다. <69세>는 슈퍼35mm 센서의 카메라를 썼고 <세기말의 사랑>은 더 얕은 심도를 구현할 수 있는 풀프레임 센서 카메라를 선택해 배경을 흐리게 잡았다.

- 로드리고를 정의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여행자’다. 여로 위의 사진 찍기와 영화 현장의 영상 찍기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영화와 드라마는 공동 작업이고 여행 사진은 개인 작업이다. 수십명이 함께하는 공동 작업은 아무리 서로 배려하더라도 심신이 지칠 수밖에 없다. 여행은 그간의 피로를 정화하며 다음 공동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채우는 시간이다. 작고 가벼운 사진용 카메라를 다루며 기계에 대한 또 다른 이해와 감각이 활성화되기도 한다. 드라마 촬영에도 사진용 렌즈를 적극적으로 도입해보는 편이다.

- 여행을 통해 세상의 불균형과 사회에 대한 부채감을 확인한다고.

최근 개인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으로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 다녀왔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직후였다. 한 난민 친구가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더라. 여자 친구가 대전까지 가서 몇 안 남은 영어판을 구해 보내줬다. 이 친구들이 맘껏 읽을 수 있도록 책도 수천권 사주고 싶고, 지난봄에 다녀온 시리아 지역에는 언젠가 학교도 짓고 싶다. 촬영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꼭 그렇게 하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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