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촬영이 계획대로 되진 않는다. 하지만 그 계획 밖의 상황들이 때로는 감흥 넘치는 우연의 순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섯명의 촬영감독에게 각자의 현장에서 겪었던 그 감흥의 순간을 물었다.
<청설> 강민우 촬영감독
“영화의 시나리오상 수영장에서 촬영된 장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배우가 물속에 옷을 입고 들어가는 장면도 찍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카메라가 배우와 함께 고스란히 그 장면 안에 머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직접 아크릴로 큰 박스를 만들고 그 안에 카메라를 넣은 후, 부력으로 물 위에 둥둥 뜬 박스를 손으로 들고 찍었다. 배우들과 같이 걷고 수영하면서. 테스트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배우들과 수영장에서 같이 논다는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찍었는데 잘 담긴 것 같다. 사전에 동선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찍은 장면도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있었지만, 카메라가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상태를 원했는데 잘 구현됐다.”
<미망> 김진형 촬영감독
“3부에서 택시를 타고 세 인물이 쭉 대화하는 신은 원래 컷이 더 잘게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처음 와이드한 스리 숏을 잡고 촬영을 해보니 원 테이크로 갔을 때의 감정이 너무 좋더라. 사실 촬영감독 입장에선 원 테이크가 좋다고 해도 편집 단계를 대비해서 컷을 더 확보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먼저 감독님께 이거 그냥 따로 찍지 말고 한 번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웃음) 콘티 짤 땐 컷을 나눠야 한다고 말하던 애가 갑자기 그대로 가자는데도 태양 감독님은 웃으면서 동의해줬다.”
<세기말의 사랑>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목욕 봉사자들이 다녀간 후 거실 창 앞에서 영미가 유진의 머리를 말려주고 로션을 발라주며 투닥거린다.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게 되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이때 분위기를 더욱 절절하게 끌어올려줄 투숏이 필요했는데, 우리의 선택은 두 사람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길이 2m의 미니 돌리로 아주 천천히 트랙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컷의 백미는 산들바람이 닿아 움직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커튼이다. 연출팀이 발코니에 숨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바람이다. 임선애 감독이 컷을 외치는 소리에 이미 감격이 배어 있었고, 배우와 스태프가 함께 모니터링할 때는 작은 축제 분위기였다. 넉넉지 않은 프로덕션에도 스태프들의 지혜가 모여 공동 작업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던, <세기말의 사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컷이다.”
<딸에 대하여> 김지룡 촬영감독
“엄마가 레인과 함께 집에서 팬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자연광과 인공광을 혼합하여 촬영했다. 유독 날씨가 맑았고, 햇빛이 무척 셌다. 강한 햇빛이 하필이면 오민애 배우 앞에 놓인 팬케이크 접시에 떨어졌다. 그 순간 접시에서 오는 금속 난반사가 오민애 배우의 얼굴과 뒤편의 벽에 비쳤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보통 영화를 찍을 때 그런 장면은 버리는 컷이다. 하지만 카메라로 그 광경을 보자마자 꼭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조명감독님은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남기면 안된다고 극구 반대하셨지만, 내게 이 장면은 관객이 그 방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실재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간절히 매달린 끝에 다행히 영화에 해당 장면이 담겼다. 다른 관객들은 발견하지 못할 수 있는 사소한 우연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장면이었다.”
<시민덕희> 이형빈 촬영감독
“영화의 후반부, 덕희가 보이스피싱의 총책과 마주한 후 공항 화장실에서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로케이션의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고, 주변 여건상 굉장히 어수선한 촬영 현장이었는데 라미란 선배께서 올곧이 영화의 감정을 지켜주시니 모든 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감정을 유지해준 선배님의 얼굴이 유독 짙게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