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장르도 감정도 정면 돌파, <대홍수> 김병우 감독
2025-01-23
글 : 이자연
사진 : 백종헌

‘대홍수가 덮친 지구의 마지막 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건 이들이 물에 잠겨가는 아파트 속에서 벌이는 사투.’ <대홍수>의 로그라인은 이해하기 쉽다. 매년 많은 관객의 전폭적인 선택을 받아온 여느 재난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홍수>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모든 것이 저물어가는 절멸의 시대. 인간의 민낯을 고발하기 바빴던 기존 재난물과 달리, 인류 보편적인 풍경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해부하는 <대홍수>는 아마도 새로운 변곡점이 될 것이다.

-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

11년 전 즈음 누나가 출산을 했다. 신생아실에서 조카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래, 네가 내 조카구나’ 하고 평범하게 지나갔는데 며칠 뒤 아이를 안고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누나를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왈칵했다. 어느 날 갑자기 누나가 엄마가 됐다니. 지금까지 아이를 안고 있는 누나를 한번도 본 적 없는데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에 너무 크게 다가왔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 느낌은 뭐지? 이 감정은 뭐지? <대홍수>의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도대체 인간의 사랑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 것이냐. 단순히 모성애나 가족주의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지점을 이야기한다.

- 재난 이야기가 따뜻한 가족 풍경에서 시작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의외라는 걸 나도 안다. (웃음) 재난물이니까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면서 생존 싸움에 초점이 맞춰질 것 같은데 갑자기 아이와 엄마라니. 어떤 면에서 통속적인 소재이지만 재난 장르를 통해 이야기되는 것은 여전히 맞다. 재난으로 시작하지만 재난으로 끝나지 않는 영화인 셈이다. 어느 순간부터 재난이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닌, 장르가 뒤바뀌는 지점이 온다.

- 그냥 홍수도 아니고 대홍수인 설정부터 압도적인데 또 아파트 내부로 이야기 범위를 좁혔다. 보다 폐쇄적인 상황으로 구체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파트는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공간이다. 윗집, 아랫집, 옆집 모두 내가 사는 공간과 똑같은 구조인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집집마다 전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집마다 하나의 독립적인 우주인 거다. 거주자의 역사와 여건에 따라 모든 환경이 달라진다. 중학생 딸이 있는 집,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의 집, 노인의 집 등등. 저마다 사정에 맞춘 이야기가 공간에 담겨 있다.

- 재난영화는 주인공이 어떤 설정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재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태도도 달라진다. 안나의 직업은 인공지능 개발 연구원이다. 동시대성이 돋보이는 직업 설정이다.

하루는 촬영장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챗지피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갔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비 오는 장면이 인상적인 <블레이드 러너>를 추천하고 싶다고 하더라. 오케이, 너 딱 걸렸어. (웃음) 그 뒤로 1993년에 나온 <블레이드 러너>가 좋은지 2017년에 나온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좋은지, 또 이 영화들을 어떻게 감상했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인공지능이랑 이야기하면 괜히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 그런데 챗지피티는 꼭 양비론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개인적인 감상을 물으면 ‘저는 감정이 없고 사람들과 좋은 정보를 원활히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입니다’라는 식의 모호한 답변만 할 뿐이다. 인공지능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계속 묻게 되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대홍수>가 도식화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인공지능이 지닌 특징을 적용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안나는 김다미 배우가, 희조는 박해수 배우가 함께했다. 이들에게 안나와 희조를 제안한 이유는 무엇인가.

안나의 주요 설정을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이것을 쉽게 예측하지 못하게 할 의외성을 지닌 배우를 떠올렸을 때 김다미 배우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무엇보다 <마녀> <이태원 클라스> <그 해 우리는>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변주해온 배우다. 그 점을 인상 깊게 보았다. 박해수 배우는 안나와 대척점에 선 희조의 야생적이고 날것인 이미지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 촬영 내내 물가에서, 물속에서 촬영한 과정은 어땠나.

정말 쉽지 않다. 촬영 기간이 6개월 정도 됐는데 그 기간 사이에 여름이 무조건 끼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속에 있으면 쉽게 체온이 내려가서 조금만 추워져도 힘들어진다. 물리적으로 그냥 모든 게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진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잘하고 싶었다. 문제가 있으면 정면 돌파하는 스타일이다. 다만 최대한 효율적으로 촬영할 수 있도록 리허설에서 동선과 합을 완벽하게 맞춘 뒤에 진행했다.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시간을 지연시키거나 회차를 낭비할 수 없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다.

- 극 중에서 어린이 배우도 큰 비중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재난 상황이나 체력 소모가 큰 촬영 환경을 설명하는 게 중요했겠다.

먼저 어린이 배우 보호자에게 촬영 장면이나 현장 여건에 대해 미리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다음 어린이 배우 당사자에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 과정에는 아역 연기를 전담한 선생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일종의 어린이 커뮤니케이터를 둔 것이다. 다른 어른 스태프들이 어린이 배우에게 직접 지시하거나 소통하지 않도록, 그래서 아이가 겁을 먹거나 주눅 들지 않도록 암묵적인 규율을 만들었다. 권은성 배우가 정말 씩씩하고 용감하게 촬영에 임해주었다.

<대홍수 >

제작 환상의 빛 감독 김병우 출연 김다미, 박해수 스트리밍 넷플릭스 공개 2025년

<대홍수>의 이 장면 “물을 평소와 달리 보이게 표현한 모든 장면들. 대홍수가 벌어졌을 때 수면 위뿐만 아니라 물의 다양한 이면을 담아내야만 했다. 물은 빠지면 죽을 수도 있지만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물이 지닌 갈증, 공포심, 경외감, 아름다움 등 다양한 감정도 함께 담았다. 비유와 상징으로서 물이 다채로운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영화에서 그 의미를 해석해내는 것도 큰 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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