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여성 조각(이혜영)은 킬러다.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신성 방역’에서 40년간 활동하며 전설로 자리매김했으나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 쇠락한 노인을 누구도 지켜보고 있지 않을 것 같으나 여기, 조각에게 시선을 고정한 남자가 있다. 같은 업계의 또 다른 30대 남성 킬러 투우(김성철)다. 소설 <파과>가 드디어 민규동 감독에 의해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부문 공식 초청 소식까지 전한 영화 <파과>는 과연 어떻게 관객의 마음을 찌를까.
첫인상이 굉장히 강렬한 소설이었다. 심리적인 폭풍이 느껴졌달까. 극적이고 다채로운 사건들이 펼쳐지는데 결국 그 사건들은 인물들이 가진 감정선의 충돌이었다. 이들이 갈등 속에 서로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방식은 인생이라는 큰 이야기가 우리 각자의 시선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소설엔 인간 존재의 복잡성, 도덕적 딜레마, 내면의 폭발이 담겨 있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동시에 매우 개인적일 수 있는 주제였다.
- 특히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느낀 지점은 무엇이었나.
소설이 다루는 진실과 거짓, 과거와 현재의 충돌은 영화적으로 탐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꼈다. 여성을 넘어 한 인간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안에서 자기를 어떻게 부수고 새로이 만들어나가는지에 관한 깊은 질문 역시 그랬다. 대단히 폭력적인데 동시에 존재하는 고요가 있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명확했다.
- 각색을 포함한 본격적인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초고를 쓴 게 2020년이었다. 다른 작품을 한 뒤 이 시나리오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어제 오랜만에 <파과> 시나리오 폴더를 열어서 최종 몇고까지 갔는지 확인했는데… 136고였다. 원작에 아주 가까웠다가 다시 멀어지는 시간이었고 8부작 시리즈 시놉시스도 썼었다.
- 최종적으로는 어느 지점에 핀셋을 꽂았나. 원작의 주요 네 인물인 조각과 투우, 조각에게 방역 기술을 가르친 류(김무열)와 조각을 치료한 적 있는 강 선생(연우진) 이외에 새롭게 추가된 인물과 에피소드가 있을까.
우선 편집본을 본 내 감상으로 답변을 대신할 수 있겠다. 1시간쯤 봤을 땐 ‘원작과는 아예 다른 이야기잖아?’라고, 다 봤을 땐 ‘원작이랑 같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국 <파과>는 치유와 성장, 상실을 딛고 새 삶을 재건하는 의지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몇몇 새 인물과 큰 사건이 등장한다. 묘사가 주인 터라 영화적인 플롯이 필요했다. 주제를 확장하는 시도를 하고 싶었고, 불안이나 두려움 같은 주된 감정적 파편을 새로운 차원에서 끌어올려야 했다. 관련해 힌트를 주자면 새 인물과 사건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모든 걸 뒤집는 역할을 한다. 투우의 비중은 꽤 많이 커졌다. 그는 세상 누구도 흔들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조각을 유일하게 흔드는 존재다. 수십년간 서로 다른 삶을 살다 만난 두 사람은 끝없이 충돌한다.
- 영화화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구병모 작가 특유의 문체를 영화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였다. 따라 읽다보면 숨이 가빠지는 만연체의 긴장을 스크린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영화로 옮기기 쉽지 않은 문체였기에 그 속에 깔린 불안한 감정의 급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새로운 대사를 채워 넣되 그 양을 최소화했고 생긴 공백은 배우의 표정과 공간이 메우게끔 했다. 서사적인 ‘숨가쁨’은 어긋난 시간의 흐름과 인물의 감정 변화가 서로 어떻게 얽히는지를 고민하면서 나의 영화적인 리듬으로 바꿔나갔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영화 <파과>는 무엇을 느끼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긴 시간 끝에 어떤 종류의 감각을 체험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답을 내렸다.
- 조각 역에 이혜영 배우를 캐스팅했다. 킬러 이혜영에 대한 기대감이 큰데 곁에서 지켜본 바 어떠한가.
이혜영 배우를 처음 만났을 때는 시네마틱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고 촬영하면서는 이 역할을 위해 태어난 분이라고 느꼈다. 조각은 강한 외면을 가졌으나 자기를 잃을 만큼의 폭풍 속에서 산다. 그리고 그 복잡성을 굉장한 침묵과 화려한 행동으로 표현하는 인물인데 이혜영 배우는 조각 그 자체였다. 고강도의 결투 액션을 소화하는 데 있어 배우의 육체적 고행이 상당했는데 이혜영의 하드보일드 액션 누아르를 보는 건 관객에게도 남다른 체험이지 않을까 싶다.
- 투우 비중이 늘어난 만큼 김성철 배우의 연기도 궁금하다.
투우는 직선적이고 단순해 보여도 감정을 미세하게 느끼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 내면의 작은 움직임을 표현할 줄 알고, 무언가를 숨기는 동시에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눈빛을 가진 배우가 필요했는데 김성철 배우가 그러했다. 그가 이혜영 배우와 극 속에서 부딪혔을 때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하모니도 무척 좋다.
- 키 스태프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촬영감독은 누구이고 그와 어떤 점을 주요하게 논의했나.
<화란> <메기>에 참여한 신인 이재우 촬영감독과 처음으로 함께했다. 심리적 긴장감이 중요한 영화인 만큼 감정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시종 인물을 감시하는 듯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인물들의 고립감과 내적 갈등을 강조했다. 조각의 고독은 넓고 차가운 공간으로, 투우의 분노는 어둡고 좁은 프레임으로 표현했다.
- 강렬한 여성 킬러 조각은 우리 눈앞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은빛 머리. 그리고 자기가 하는 살인이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조각은 그 일에 나설 때 성직자처럼 화이트 셔츠를 입는다. 조각의 의상에서 그의 내면의 상처나 고된 삶의 흔적이 드러나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파과>
<파과>의 이 장면 “조각과 투우가 서로의 내면을 드러내면서 치명적인 선택을 내리는 순간이 있다. 그때 심리적 액션을 통해 표현되는 감정선의 압박감을 유심히 봐달라. 그 느낌을 포착한 순간, 이 영화는 당신 안의 무언가를 깊숙이 건드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