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일까, 확신일까. 2009년 왕가위 감독이 중국의 전설적인 무예가 엽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대종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을 때, 모두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선점자가 있었다. 2008년 겨울 대륙의 박스오피스를 휩쓴 엽위신 감독의 <엽문>이다. 영춘권의 대가이자 무술의 대중화에 힘쓴 엽문의 일대기를 충실히 훑은 이 영화는 현재 중국 무협영화계의 ‘넘버 원’ 액션배우 견자단을 앞세워 절정의 액션장면으로 관객을 홀렸다. 그런 <엽문>이 무술감독 홍금보가 참여한 속편을 제작하고, 뒤이어 2010년 허먼여우 감독이 엽문의 청년 시절을 다룬 <엽문전전>을 만들면서 엽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는 중국영화계의 일종의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엽문 영화에 대한 구상을 최초로 얘기한 사람은 2002년의 왕가위였으나, 이러한 일련의 유행으로 인해 그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란 부담감과 함께 경쟁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미답의 엽문을 보게 되리란 관객의 기대도 함께 떠안게 됐다.
엽문을 연기하는 액션배우 양조위
다행히 지난 11월 아메리칸 필름마켓에서 공개된 시놉시스에 따르면, <일대종사>로 우리는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엽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1930년대 포산 지역은 중국 방방곡곡의 영춘권 고수들이 몰려드는, 일종의 무술 도시다. 무술에 삶을 바친 고수들은 때때로 실력을 겨루기 위해 장소와 식량을 통제하고 최후의 승자가 나타날 때까지 자웅을 겨루는 서바이벌 게임을 즐긴다. 엽문(양조위)은 이 대결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고, 한 고수의 딸은 그런 엽문을 사랑하게 된다. 한편 포산 지역 군부의 수장이 부하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포산의 모든 고수들은 암살자를 처단하겠다는 대의 아래 집결한다.
이처럼 줄거리로 짐작해본 <일대종사>는 엽문의 전기영화라기보다는 왕가위 감독의 해석이 짙게 반영된 픽션의 느낌이 강하다. 하긴 되돌아보면 왕가위 감독의 또 다른 무협영화 <동사서독>(1994) 또한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문>을 원작으로 삼았으나 그보다는 “원작에 새로운 생각을 덧칠하고, 제외하고, 추가하고, 다른 생각과 연결시키면서 무한히 많은 무협소설들이 서로 가로지르고 통과하는 일종의 교차로”(정성일)를 만들었다는 점이 의미있는 작품이었다. 짐작건대 <일대종사> 또한 다양한 갈래의 해석들이 낳을 새로운 정서를 기대해볼 만한 영화가 아닐까.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것은 양조위의 ‘엽문’이다. 아무리 양조위가 드라마 <의천도룡기> <녹정기> 등의 무협물에 출연했다 하더라도 그는 액션배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엽문>의 엽위신 감독은 양조위의 ‘엽문’에 대해,묻자 ‘담배 피우는 모습이 기대된다’(엽문은 실제로 애연가였다)며 액션에 대한 코멘트를 피하기도 했지만, <일대종사>의 무술감독 원화평은 양조위의 액션 연기에 대한 이러한 우려를 일축한다. “양조위의 컨디션은 이 영화에서 절정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몸 상태에 대해 얘기하자면 양조위가 견자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촬영 도중 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다리 훈련을 계속했다는 양조위의 집념이 어떤 스타일의 액션 연기로 드러나게 될지 궁금하다. 더불어 장쯔이와 장첸이 포산 지방의 또 다른 고수를, 송혜교가 엽문의 아내를 맡아 연기하며 자오벤샨, 샤오선양 등이 출연한다.
2월 개봉예정, 영상은 미공개
2011년 2월에 개봉예정인 <일대종사>는 얼마 전 공개된 1차 트레일러에서조차 단 한컷의 영상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트레일러와 함께 공개된 포스터는 이 영화에 대한 팬들의 오랜 기다림을 무색하지 않게 한다. 비 내리는 밤, 하얀 밀짚모자에 검은 코트를 입고 정체 모를 자들에 둘러싸인 엽문의 머리 위에는 이런 글자가 쓰여 있다. “마셜 아트의 세계에서 옳고 그름이란 없다. 오직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피도 눈물도 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뛰어든 왕가위의 새로운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