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이름이 즐비하면 안이한 명단이라 불평하고 신인이 많으면 차림표가 빈약하다고 투덜대는 것이 국제영화제 구경꾼들의 간사한 입맛. 2010년 칸영화제 선정작이 발표되기 무섭게 평론가들은 2011년이야말로 풍년이 되리라는 조기예보를 성급히 제출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열여덟 번째 장편 <내가 사는 피부>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위험한 메소드>,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 다르덴 형제의 제목 미정 프로젝트와 나란히 2011년 칸영화제를 흥청이게 만들 후보로 꼽혔다.
프랑스 작가 티에리 종케의 소설 <땅거미>가 원작
구구절절한 비련을 히치콕식 스릴러로 푼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에 이어 알모도바르가 예고한 ‘장르’는 공포(terror). “비명이나 경기(驚起)가 없는 공포영화가 될 것”이라는 부연 설명에 마음을 놓을까 싶다가도 “과거 나의 어떤 영화보다 심한(harsh) 영화”라는 감독의 덧말에 쭈뼛하다. 다른 어떤 감독보다 터부를 넘나드는 비극과 욕망을 원색의 스타일로 그려온 알모도바르가 무려 형용사 최상급을 쓴 것이다. 2002년 무렵 알모도바르가 처음 구상한 <내가 사는 피부>는 프랑스 작가 티에리 종케의 1984년작 소설 <땅거미>(Mygale, 영미권 번역 제목은 <타란튤라>)를 원작으로 밝혔다. 초기에 흘러나온 한줄짜리 시놉시스는,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병원에 수용된 딸을 둔 성형외과 의사가 가해자를 잡아 강제 성전환으로 보복한다는 이야기. 이 불행한 사내에게는 외상이 하나 더 있으니 교통사고로 불에 타 죽은 아내의 기억이다. 사별 뒤 십수년의 연구 끝에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인조피부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그는 목표를 위해 의료윤리를 넘어서는 실험도 서슴지 않는다.
알모도바르가 무려 아홉개의 판본을 내며 각색한 시나리오는 원작을 자유롭게 변형했다고 알려졌지만, 캐스팅된 주요 배우의 수로 미루어볼 때 원작의 서사구조는 얼마간 보존될 것으로 짐작되는 바, <땅거미>의 줄거리를 살짝 엿보자. 성공한 성형외과의 레드가드는 함께 사는 여인 이브를 극진히 대하지만 밤이면 감금하고, 때때로 매춘을 시키며 그 광경을 창 너머에서 지켜본다. 한편 이야기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다른 컴컴한 방에 갇혀 발가벗겨진 채 고문당하는 한 남자와 도주 중인 은행 강도의 사연으로 가지를 친다. 여러 갈래의 서사를 쫓다가 마지막에 기어코 하나로 수렴시키는 <땅거미>는 제목처럼 거미줄 같은 소설이다. “데이비드 린치나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로 만들면 딱이다”라고 쓴 아마존닷컴의 독자 후기가 자못 시사적이다. 우연의 개입이 과한 서사라는 중평이 있으나, 늘 합리적 인과보다는 운명이 중책을 수행하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성향을 고려하면 치명적 결함은 아닐 터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21년 만의 귀향
<내가 사는 피부>를 안절부절 기다리게 만드는 이름은 안토니오 반데라스. 알모도바르 초기작의 동반자였던 그는 극심하게 뒤틀린 인물 레드가드로 분해 <욕망의 낮과 밤> 이후 21년 만에 고향의 거장과 재회한다. 라틴계 섹시한 애인도 좋고,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도 귀엽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극적인 기능 너머의 감정과 잠재력을 발휘하며 안으로 타오르는 반데라스를 보리라는 기대는 흥분을 자아낸다. 여배우는 애초 페넬로페 크루즈가 거명됐으나 훌리오 메뎀의 <섹스 앤 루시아>로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엘레나 아나야가 캐스팅됐다. 여섯 편째 알모도바르 영화에 출연하는 마리사 파라데스, <브로큰 엠브레이스>에서 재벌 어니스토 역의 호세 루이즈 고메즈도 합류했다. 음악은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촬영은 호세 루이스 알케인, 알모도바르 영화의 ‘유주얼 서스펙트’ 그대로다. 2010년 8월23일부터 스페인 북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마드리드, 톨레도 등지에서 11주간 촬영을 마친 <스킨 아이 리브 인>은 알모도바르 전작들의 전례대로 스페인 개봉 뒤 칸영화제의 초청을 받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