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골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에서 나의 유일한 라이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땡땡이다.” 2차대전 이후 프랑스를 태양왕처럼 군림했던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역사상 유럽의 어떤 왕과 대통령, 총리도 땡땡처럼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대중에게 미친 적은 없다. <땡땡의 모험>은 벨기에 작가 에르제가 1929년 탄생시킨 만화로, 소년 기자인 땡땡과 애완견 밀루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펼치는 모험을 그린다. 이 벨기에의 국보적 만화 시리즈는 전세계 60개국에서 3억부가 팔려나갔고, 한국에서도 80년대의 전설적인 만화 잡지 <보물섬>에 연재됐다. 그런데 20세기의 아이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왜 지금까지 영화화되지 않았냐고? 대답은 하나다. 땡땡이 스티븐 스필버그를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아니, 스필버그가 땡땡을 기다려왔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오로지 스필버그만을 원한 원작자 에르주
사실 스필버그가 <땡땡의 모험>을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던 건 <E.T.>를 연출한 직후다. 불만족스러운 대본이 이어지자 그는 영화화를 포기하고 판권을 다시 에르주 재단에 넘겼다. 클로드 베리와 로만 폴란스키가 관심을 보였으나 에르주는 오로지 스필버그만을 원했다. 지금은 작고한 에르주는 “스필버그야말로 땡땡을 제대로 만들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2년 판권을 재구매한 스필버그는 CG애니메이션으로 땡땡을 되살리려 시도했으나 프로젝트는 다시 지체됐다. 오랫동안 할리우드와 벨기에를 오가던 땡땡을 스필버그가 마침내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기술이 마침내 그에게 맞게(혹은 땡땡에게 맞게) 숙성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 캡처라는 기술 말이다. “퍼포먼스 캡처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 영화는 에르주라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야 했고, 최대한 에르주의 예술 작품에 근접하고 싶었다. 에르주는 판타지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계에서 살아가는 가상의 인물들을 그려냈다. 그걸 실사로 만든다면 관객이 접근하기에는 지나치게 스타일화된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이를테면 배우들에게 원작의 코스튬을 입히면 좀 웃겨 보였을 거다. 에르주의 스타일은 디지털이라는 미디엄을 통해서만 더 완벽할 수 있다.”
여기서 오랜 오해 하나. 스필버그는 테크놀로지의 선구자였던 적이 없다. 테크놀로지와 드라마투르기를 동시에 고안하는 제임스 카메론, 로버트 저메키스(혹은 스탠리 큐브릭)와 달리 스필버그는 고색창연할 만큼 전통적인 연출가다. 그의 영화에서 테크놀로지는 왼손처럼 거들 뿐이다. 자, 그러니 이 남자가 피터 잭슨의 도움으로 아무것도 없는 녹색의 공간에서 시커먼 옷을 입은 배우들과 연출하는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시라. “너무 흥미진진했다. 감독이라기보다는 좀더 화가가 된 느낌에 가까웠다. 이전에 연출할 때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해야 했다.” 이건 숫제 새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의 이야기처럼 들릴 지경이다. “이전까지 영화를 연출할 땐 언제나 한쪽 눈을 감았다. 영화가 스크린에 영사될 때처럼 2D로 현장을 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눈을 모두 열고 있어야 했다!” 오랫동안 염원하던 땡땡과 오랫동안 꿈꿔온 기술을 두손에 쥔 거장이 얼마나 경천동지할 물건을 내놓을지 확인하려면 올해 말까지 기다려야 한다.
<인디아나 존스>의 새로운 버전?
참, 이게 무슨 내용이냐고? 주인공 땡땡(제이미 벨)은 모형 배를 친구인 아독 선장(앤디 서키스)에게 선물한다. 알고 보니 모형 배는 아독 선장의 선조인 프랑수아 아독 기사의 초상화가 그려진 침몰선 유니콘호와 똑같으며, 강아지 밀루가 돛대를 부러뜨리면서 해적이 묻어놓은 보물지도까지 발견하게 된다. 두 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는 이제 보물을 찾으러 떠나고, 곧 땡땡의 숙적인 해적 래컴(대니얼 크레이그)을 만나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라고? 그렇다. 이건 스필버그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세기의 <인디아나 존스>다. 끔찍했던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은 잊어버려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