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 시도를 반기는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의 50주년 개막작으로 이보다 어울릴 작품은 없을 것이다. 2023년 9월 백현진 배우가 연출자로서 올린 공연 <백현진쑈: 공개방송>의 기록 영상에서 출발한 영화 <백현진쑈 문명의 끝>은 여기에 박경근 감독이 찍어둔 백현진의 일상과 페이크다큐멘터리를 섞어 완성됐다. 미술가이자 배우, 음악가, 연출가로서 정형화되지 않은 작업을 이어가는 아티스트 백현진의 세계를 더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 이번 작품은 유독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개막식 상영 및 GV 이후 받은 피드백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
보통 결과물이 만들어지면 바쁘게 다음 일을 시작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관객 반응이 무척 궁금하더라. GV 때 한 관객도 평소랑 다르게 왜 이번 작품이 더 궁금하냐고 묻길래 답했다. “이건 남의 작업이잖아요.” (웃음) 엄연히 박경근 감독의 연출작이고 나는 프로듀서로서 참여한 거니까. 영화제에서 상영을 했으니 공식적으로 영화로 분류되긴 했지만 형식 면에선 낯설게 여겨질 작품이다. 그런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즐거워할지, 짜증난다고 할지 알고 싶었다. 어떤 분이 SNS에 ‘모두 다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쓴 걸 봤는데 무척 고맙더라. 박경근 감독이 1년 넘게 이 영화를 붙들고 씨름한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후로도 미술관, 영화관, OTT 플랫폼 등 여러 창구를 통해 많은 이와 접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 공연과 공연 기록 영상은 관객 입장에서도 완전히 다른 인상을 남긴다. 그럼에도 공연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현대미술 신에서 30년 넘게 일해온 작가로서 아카이빙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박경근 감독의 촬영 스타일을 좋아해 기록을 부탁했고 토킹 헤즈의 <스톱 메이킹 센스>라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공연 기록 영상을 박 감독에게 한번 보라고 했다. 그걸 보더니 “이거랑 다르게 재밌게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기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 박경근 감독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 박경근 감독의 작가로서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박경근의 필모그래피를 충분히 맛봐온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보이고 들리는 것에 관한 감각과 기술이 좋은 연출자다.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적인 요소들도 탁월하게 조율해낸다.
- 공연에 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백현진쑈: 공개방송>에 상당히 많은 아티스트가 참여했고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공연 스타일이 다르다. 가령 배우 김고은은 독백을 하고 김선영은 무언의 퍼포먼스를 하며 한예리는 립싱크 공연을 하는 식이다.
실제로는 밴드 멤버까지 퍼포머만 20명 정도가 참여했다. 퍼포머 한 사람, 한 사람의 공연을 ‘챕터’라고 불렀는데 총 10개 이상의 챕터로 구성된 공연을 올렸고 이를 박경근 감독이 영화에서 자유롭게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컨셉은 개별 퍼포머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을 택했다. 접근 방식도 다 달랐는데 김고은 배우는 인터뷰를 길게 한 뒤 스크립트를 완성했고, 문상훈씨는 작가로서도 좋아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기본 구성만 갖춘 뒤 같이 시나리오를 썼다. 장기하씨는 가수로서, 김선영씨는 배우로서 가진 강점을 각각 노래와 무언극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
- 기본적인 틀은 갖추되 공연에서의 즉흥성을 강조했다.
작업할 때 생겨나는 수많은 우연성, 즉흥성을 무척 환영한다. 공연도 몇 가지만 약속한 상태에서 퍼포머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 영화화가 결정된 뒤 공연 영상에 백현진 개인의 일상과 페이크다큐 영상이 더해졌다. 작업 과정에서 박경근 감독과 어떤 식으로 의견을 조율했나.
공연을 올리기 전후로 박경근 감독이 내 작업실에 놀러와 찍어둔 푸티지가 있었다. 나라는 피사체를 감독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공연 영상, 내 일상이 담긴 영상, 합의하에 연출된 페이크다큐멘터리가 섞여 영화가 완성됐다. 박경근 감독은 공연의 현장성이라는 3차원의 것을 2차원으로 가져올 때 수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반대로 3차원에서는 볼 수 없던 수많은 것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서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더라. 알겠다고 한 뒤 별도의 의견 조율 없이 믿고 맡겼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였던 시절, 박경근 감독의 작품에 내가 퍼포머로서 참여하고 설치 작업을 할 때 내 퍼포먼스를 박 감독이 와서 촬영해준 적이 있다. 품앗이로 서로의 작업을 돕는 게 당연해서 <백현진쑈 문명의 끝>도 무리 없이 만들 수 있었다.
- 영화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는 일, 일어난 모든 일은 있는 일”이란 말을 흥얼거리는데, 일민미술관의 <이마픽스 2024>에 전시한 작품에도 동일한 문구가 적혀 있고 지난 9월에 발간된 작품집의 제목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는 일>이다. 이 문구가 중요한 모토인가.
지금 내게 가장 유용한 만트라 중 하나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을 때 입버릇처럼 멜로디를 붙여 부르곤 한다. 한편으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듣거나 사용해도 좋겠다고 여기는 문구다. 어릴 때는 ‘듣는 귀, 보는 눈이 있는 사람들이 내 작업을 찾아보고 좋아하겠지’라는 건방진 생각을 했었다. 여전히 나는 나를 위해 작업하지만, 최근에는 사람들이 내 작업을 즐길 수 있었으면 싶은 마음으로까지 나아갔다. 물론 대중의 의견이 내게 영향을 미칠까봐 더 나아가진 않지만, 어쨌든 그런 변화가 생겼다.
- 미술, 음악, 연기, 공연, 연출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서로 어떤 시너지효과를 내나.
지금은 완전히 한 덩어리가 돼 상호 보완적으로 움직인다. 나는 스스로를 OS라고 여긴다. 이 OS 안에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이 있고 그게 서로 맞물려 돌아가다 상황에 맞게 필요한 걸 작동시키는 것이다.
- 더 편하다고 느끼는 애플리케이션도 있나.아직 ‘연기’라는 앱이 좀 버벅대긴 한다. 작곡이나 페인팅같이 혼자 하는 작업이 더 편하고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하는 일에선 버그가 발생한다. 어릴 때는 그 버그를 다 없애고 싶어 조바심이 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혼자 난리 친다고 버그가 사라지진 않으니까, 지금은 현재의 상태를 받아들였다.
- 박경근 감독과 또 협업할 계획인가.계속 같이 작업할 거다. 영화 크레딧 제작란에 적힌 ‘타이거 울프 프로덕션’이 우리의 팀명이다. 팀명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타이거 울프’ 이런 건 완전 깨잖아”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박경근 감독이 좋다더라. (웃음)
- 내년에는 백현진 개인의 연출작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지금 20~30분 분량의 6회차 숏폼 시리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마포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상 드라마인데 장르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려 한다. 그 밖의 계획으로 내년 봄에 정규앨범 《서울식》이 나오고, 7월에 LA의 타냐 보낙다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뒤 하반기엔 배우로서 두 작품에 출연할 예정이다. 내년에도 공연하고, 작업하고, 촬영장 다니며 가능한 한 즐겁게 시간을 보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