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운명을 기다리며
2012-10-23
글 : 이화정
사진 : 이동훈 (객원기자)
<아비가일> 배우 아만다 플러머

<피셔 킹>에서 로빈 윌리엄스의 상대역, 혹은 <펄프 픽션>에서 팀 로스와 짝을 이룬 여자 건달. 어느 쪽이든 영화팬들에게 인상적인 그녀의 연기를 잊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대표작으로만 오늘의 그녀를 규정하기에 이후 아만다 플러머의 행보와 보폭은 넓고도 길고, 빠르다. 최근작만 보더라도 불과 1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발표된 이와이 지의 <뱀파이어>에서 그녀는 치매 걸린 노파(!)였다. 커다란 풍선을 매달고 방 가운데 덩그러니 있던 그녀가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하나와 앨리스>에서 발레를 하던 앨리스의 예쁜 모습처럼 환상적이었다.

정이삭 감독의 <아비가일>에서 그녀는 <선녀와 나무꾼>의 인물이 된다. 선녀가 아니라 슬프게도 그녀의 역할은 ‘나무꾼’이다. 뉴욕에서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중년의 여성 아비가일. 그녀는 낯선 동양 청년을 만나 도움을 주고, 그 남자와 애정을 나눈다. 언제 그가 그녀가 숨겨놓은 옷을 찾아 떠나 버릴지 모르는 불안한 관계.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 영화에서 아만다 플러머는 아비가일의 고독한 내면을 아름답고 아프게 표출해낸다. <아비가일>은 정이삭 감독의 전작 <문유랑가보>를 감동 깊게 본 아만다 플러머가 직접 감독에게 이메일을 쓰면서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다. 사실 그녀에게 이런 적극적 시도는 그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촬영이 없는 날엔 하루 다섯 편의 영화를 본다. 아시아영화엔 특히 관심이 많아, 신작은 물론이고 고전 작품까지 구해서 본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역시 전작을 다 보고 ‘운명의 연락’이 오길 기도했다는 귀여운 여배우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딸이기도 한 그녀. 수백 수천 번은 들었을 질문인 ‘배우의 딸로 사는 것에 대하여’에 대해서 그녀는 “존재를 알았지만, 막상 그를 만난 건 배우가 되고 나서인 18살 때였다”며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한다. 7살 때부터 소설을 썼고, 오페라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지냈다는 그녀. 한때 경주마를 훈련시키기도 했던 그녀는 생계를 위한 선택으로 배우가 됐다. 직업이지만 지금도 연기는 그녀를 설레게 하는 에너지다. 2009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후 한국은 두 번째 방문. “차마 한명을 꼽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좋아하는 한국 감독의 리스트가 쌓여 있다”는 그녀는, 지금도 또 다른 운명의 기회를 기다리는 중이다. 열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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