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환청, 환각에 시달리며 각본 썼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2012-10-23
글 : 이화정
사진 : 박성훈
<가족의 나라>의 양영희 감독

북송사업의 일환으로 1970년대 북한에 가서 돌아오지 못한 9만 4천명의 재일동포. 그 중 세 명이 양영희 감독의 오빠였다.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은 체제와 이데올로기로 인해 선택권을 박탈당한 감독 자신,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였다. <가족의 나라>는 그녀가 차마 다큐멘터리에 넣지 못하고 꼭꼭 눌러놓았던 남은 이야기를 토대로 한 극영화다. 기교나 수식 없이 들려주는 그녀의 아픈 속엣말은, 듣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감정의 파고를 일으켰다.

-<굿바이, 평양> 때 극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었는데, 극영화는 어떻게 현실화된 건가.
=가와무라씨(제작자)가 정말 크레이지한 사람이다. (웃음) 내 다큐멘터리를 잘 봤다며 한번 만나자고 하더라. 양영희 감독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를 만들어야 된다며, 이야기가 있냐고 하셨다. 사실 그냥 한번 해본 소리려니 했는데, 3일 후에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벌써 프로덕션 스케줄을 다 짜 놨더라.

-일본에서 만들기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다.
=쉽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절했고 투자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가와무라씨 도움이 컸다. 영화 찍으면서 한번은 촬영하고 집에 갔더니 전기가 끊어졌더라. 바빠서 전기세를 못 낸 게 아니라 돈이 없었다. 난 돈 벌면 어머니에게 드리고, 어머니는 또 그 돈을 북한의 오빠들에게 보내고 그러셨다. 속상하기도 하고, 어쩔 수도 없고. 그게 우리 집 돈의 흐름이다.

-캐스팅 역시 마찬가지 문제가 있었을 것 같다. 일부 극우파에선 ‘아라타도 조선인이냐’고 비아 냥거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맞다. 비방글 올리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그런데도 배우들이 너무 “예스”라고 해줘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한편으론 그게 지금 일본 영화계의 현실인 것 같다. 만화 원작이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영화로 만든다. 어떤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까가 아니라 보험이라는 차원이 중요해진 거다. 절대 대박이 난다는 보험. 창조가 사라진 거다. 이렇게너무 예쁜 영화 위주가 되니 배우들도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내가 부탁 안한 배우들도 매니저들이 시나리오 봤다면서 우리 배우 좀 써달라고 할 정도였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할 때보다 극영화를 할 때, 가족을 대신할 배우가 있을 때 더 많은 내면의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큐멘터리는 카메라 앞에서만 하는 이야기다보니 제한이 있다. 사람들에겐 카메라 앞에서 안하는 이야기, 못하는 이야기, 그리고 카메라가 없어도 절대 안하는 이야기가 있다. 카메라가 없어도 마음을 닫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안 하는 걸 꺼내야 영화가 되고 소설이 된다. 순서상으로는 다큐멘터리 이후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구상한 건 십년이 넘었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도 항상 다큐와 픽션 양쪽을 다 생각하며 찍었다. 지금 못 찍은 건 극영화로 분류해 두었다.

-분류의 기준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로 하지 못하고 극영화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 혹은 극영화를 위해 남겨둔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픽션이니 어떻게 써도 괜찮지만, 그때 아빠는, 엄마는, 오빠는 어땠을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다큐 작업 때도 술을 많이 마셨지만, 극영화 쓸 때는 술이 아니라 환청, 환각에 시달렸다. 이거 한편 만들고 나면 나 정말 힘들겠다, 심리 치료사를 소개받아야 하겠다, 할 정도였다. 그래도 철저하게 내가 하고 싶은 걸 말할 수 있는 기회였다. 불만을 말하기 전에 행복한 거다.

-<굿바이, 평양> 때 평양의 조카가 신은 미키마우스 양말이 혹시 미제품 쓴다는 걸로 비난 받을까도 걱정하면서 촬영했다고 했다. 극영화를 작업할 때는 그런 민감함에서 좀 자유로워질 수 있었나.
=지금도 오빠들, 조가들이 평양에 사니까 가족에게 피해를 주면 안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큐를 만들 때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전엔 가족에게 피해 안 가게 하려고 편집도 조심했다. 김정일 수령이라고 써야할까, 장군님이라고 써야할까 조차도 고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아로 유명해지자, 우리 가족을 아주 유명한 가족으로 만들면 오히려 뭐라고 못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고방식을 바꿨다. 그래도 매일 자기 전에 침대에 누우면 걱정이다.

-제목 <가족의 나라>에서 의미하는 가족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 인가.
=우리 아빠는 남한 출신인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에서 세상을 떴다. 나는 국적은 한국이고 고향은 일본이고, 북한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아닌데 조국이라고 배웠다. 홈랜드, 파더랜드 마더랜드 다 다른 것 같다. 비록 지금은 입국금지지만, 예전에 오빠들을 만나러 가면 북한에서 ‘조국에 잘 왔다’, ‘조국에 충실하라’는 말을 들으니 조국이라는 말이 싫었다. 난 그 말에 알레르기가 강하다. 국기가 그려진 티셔츠도 못 입는다. 영화가 말하는 ‘나라’란 국가가 아니라 ‘장소’다. 성호(아라타)의 가족에게 있어서 진짜 그 자리가 어디일지 나도 아직 찾고 있다.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극영화도 계획 중인가.
=극영화를 또 만들고 싶고, 생각하고 있다. <GO>나 <박치기!> <피와 뼈>같이 조선인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많았지만, 옛날이야기였다. 현재의 북한과 직접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다. 남북한과 관계가 있는 작품을 하고 시다. 일본 작품을 대표해서 아카데미상 출품작으로 선정된 것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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