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림 감독의 신작 <비상선언>은 전작 <더 킹>(2016)과 거의 정반대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더 킹>이 평범한 인간에서 권력자가 되기까지 한 인물의 일대기를 거리를 두고 그린 정치 풍자극이었다면,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을 맞닥뜨린 비행기 승객의 감정을 가능한 한 유사하게 체험하도록 유도하는 영화다. 배우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 톱 배우들의 캐스팅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몰입감을 높이는 데 더없는 호재다. 우주필름 사무실에서 만난 한재림 감독은 “그저께(2020년 12월 28일) 새벽 4시까지 가편집본은 다 끝냈다. 애초 의도대로 정리가 된 것 같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더 킹>은 많은 공간에서 촬영을 진행한 반면, <비상선언>은 비행기와 지상으로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 극과 극을 체험하는 기분이겠다. 어느 쪽이 적성에 더 맞던가.
=프로덕션 운영은 <비상선언>이 훨씬 더 편했다. <더 킹> 땐 하루에 최소 2~3공간을 다녔다. 스탭들이 장비를 풀고 찍고 또 정리하고 옮기는 것을 몇번씩 반복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비상선언>은 세트 분량이 60~70%, 로케이션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연출적으로 봤을 땐 둘 다 장단점이 있다. 공간이 많을 때는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어필할 수 있다면, <비상선언>은 보다 밀도 있게 공간을 그려내야 한다.
-그래서 비행기 세트가 정말 중요했겠다. 해외에서 공수해오지 않았나.
=하와이까지 갈 수 있는 장거리 비행기를 등장시켜야 했다. 에어버스는 핸들을 스틱으로 움직여서 시각적으로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 속 비행기는 반드시 보잉 777이어야만 했다. 이런 일을 수월하게 해줄 수 있는 할리우드팀을 찾았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비행기 무덤에서 비행기를 공수한 후 그걸 잘라 패키징해서 보내주는 작업을 한다. 의자 시트나 바닥 등 내부 인테리어는 우리 영화 컨셉에 맞게 바꿨다. 원래는 의자가 파란색이었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승객에게 좀더 동화될 수 있게끔 따뜻한 느낌을 미술적으로 표현했다. 조명은 비행기를 탔을 때의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리얼하게 설계했다. 영화 내용상 실제 승객을 태우고 비행기에 짐벌을 장착해야한다. 할리우드에서도 그리 많이 해본 작업이 아니다. 비행기가 요동치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360도로, 한 100번은 돌렸다. 한국 최고의 특수효과팀과 무술팀이 모여 많게는 70명 정도의 배우와 스탭이 안전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장면을 구현해냈다. 현장에서 한명도 안 다쳤다.
-100% 핸드헬드로 찍었다고.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 등 초기작 이후 오랜만 아닌가.
=이모개, 박종철 촬영감독이 비행기에 몸을 꼼꼼하게 묶어서 고정시킨 후, 비행기가 돌 때 카메라를 들고 승객의 표정을 잡아냈다. 핸드헬드라는 게 감독 입장에서는 촬영감독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는 일인 것 같다. 테이크를 갈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바뀌었을 때 조금씩 카메라를 바꾸는 감각에도 의존해야 하지만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이 긴장감 있게 봤으면 좋겠다고, 관객이 리얼하게 체험하게끔 하고 싶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 웃고 울린다거나 하는 재난영화의 공식 같은 건 없다. 배우들의 애드리브도 없다.
-송강호 배우가 굉장히 오랜만에 동시대의 형사 캐릭터를 연기했다. <살인의 추억> 때는 발로 뛰었지만, 지금의 송강호가 연기하는 형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지상에 송강호가 있다면 비행기에는 이병헌이 있다. 비행기 공포증이 있으나 딸을 위해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 승객을 연기한다.
=인파를 헤치며 열정적으로 수사하는 형사였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힘이 부쳐서 사람이 몰려 있는 현장에 잘 들어가지 못하신다. (웃음) 선배님에게도 노안이라 신문도 안경 끼고 보고 영어도 잘 못하고 핸드폰도 잘 못 다루는 캐릭터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인물에 중요한 건 ‘로맨틱함’이다. 아마 <비상선언>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시나리오 쓸 때 이 캐릭터를 생각하며 맨날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를 들었다고 선배님에게 얘기했더니 굉장히 의외라면서 놀라긴 했지만. (웃음) 결국 이 인물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지상에 남는다.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결국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맞닥뜨린다. 병헌 선배님은 겁도 많고 어떻게 보면 순수한 철부지 아빠로 나온다. 선배님 특유의 재밌으면서 진지하고 진실한 모습이 그려질 것 같다.
-재난영화에는 ‘빌런’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비상선언>에서는 어떤가.
=부유한 집에서 잘 살던 사람이 느닷없이 총기를 난사하는 라스베이거스 총기 테러 사건 같은 것을 다룬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그 이후 평생 트라우마를 갖고 사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췄다. <비상선언>에서는 악인이 왜 그런 인물이 되었는지 설명하는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서도 이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빌런이 있다면 재난 상황 자체일 것이다.
-정부 비판이 아니라 시스템의 호기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장관 역을 맡은 전도연 배우의 역할이 기대된다.
=관습적이고 표리부동한 시스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게 이 영화에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더 포인트를 뒀다. 그걸 상징하는 인물이 전도연 선배님이 될 것이다. 재난 앞에 인간은 나약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하고 안절부절못한다. 그럼에도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 있다. 우리는 즉각적인 리액션만 하는 존재가 아니지 않나.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갈등이 생길 수 있고, 의견이 충돌하며 나오는 리얼한 묘사가 있을 것이다. 영화적인 히어로가 없기 때문에 판타지가 충족되지는 않을 테지만 현실적인 느낌을 전달할 것이다.
-세월호와 코로나19 이후 재난영화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재난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재난이 있었다. 지금까지 영화는 재난을 겪고 이겨내는 과정에 집중했다. <비상선언>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진심을 다해 움직이고 사람들을 구해내는 모습을 통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재난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모습이 어떻게 조망될지 기대된다. 공동체 생존을 위해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인간들의 가치관 대립이 묘사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비행기 안에서도, 비행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대립이 있다. 비행기 안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지만 밖에서는 남의 일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관객에게 묻는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겠냐고 말이다.
시놉시스
‘비상선언’이란 항공기가 재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기장의 판단에 의해 무조건적인 착륙을 선언하는 비상사태를 뜻한다. 하와이로 향하던 <비상선언>의 비행기 역시 사상 초유의 상황에 직면해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 무조건적인 착륙을 선언한다.
관전 포인트
“각자 캐릭터가 있고 무언가 하나씩 하며 충분히 다 보여진다.” <어벤져스>시리즈를 방불케 하는 배우 라인업이 캐스팅 단계부터 화제였다. 특히 한재림 감독은 “그 좋은 배우들이 모여서 굉장히 연기를 잘했다. 원래도 잘하는 분들인데 진짜진짜 더 잘했다. 그게 영화에 잘 드러나서 기분이 좋다”고 강조했다. 다른 비행기 승객도 전부 오디션으로 선발해 연기의 완성도를 높였다. “세트도 세트지만 비행기 장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의 향연이 아닌가 싶다. 내가 정말 자랑하고 싶은 건 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