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야 감독은 영상 작업을 하는 틈틈이 독립출판서점 유어마인드에서 일했던 경험과 인연을 바탕으로 영화 외에도 사진과 음반 작업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만들어왔다. 그 기록은 그의 홈페이지(http://lightonthewall.com)에서 상세하게 볼 수 있다. <집의 시간들> 역시 책과 영화가 동시에 기획된 사례다. 이제는 재건축을 앞두고 철거된 둔촌주공아파트의 낡지만 포근했던 순간을 담아낸 영화 <집의 시간들>이 개봉된 이후 라야 감독을 다시 만나 후일담을 들어봤다.
-개봉 이후 관객과 만날 기회가 많았을 텐데 영화에 대해 주로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자신은 아파트에 살아보지 않았는데도 공감이 가더라는 반응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흔히 집의 형태에 따라서 사는 모습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하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은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또 특수한 자신의 가족사를 떠올리게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집이란 공간이 좋은 기억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개봉 당시 이미 단지가 철거 중이었을 텐데 철거 과정이나 혹은 영화에 등장했던 가족들의 삶을 따라다니며 담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나.
=함께 작업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기획자 이인규씨가 자신은 아파트가 무너지는 걸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는데 나도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온전한 모습으로 이별하길 바랐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데 영화 속 전조등을 언급했던 분은 실제로 이사 갈 때 떼어가셨다고 한다. 다른 미술 작업하는 분들 중에는 현장 허락하에 철거 현장을 찾아가 전조등을 여러 개 구해오셨다는 분도 있었다. 미술 작업이나 전시 등에 쓸 계획이라고 한다.
-주민들 개개인의 삶보다는 집이란 공간에 집중하는 영화이지만 주거 공간은 그 자체로 사는 사람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집의 시간들>은 곧 ‘주민들의 시간들’을 보여주는 영화기에 주민들의 이후의 삶도 궁금해졌다.
=영화를 만들 때는 관심이 가는 대상이 공간이다보니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궁금한 사람이 한명 있다. 오래된 주공아파트가 불편해도 좋다고 이야기하다가도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구집에 가서 탁 트인 뷰를 보면 또 으리으리한 아파트가 역시 좋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던 분이 궁금하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아파트와 혹은 집이나 건축물과 관련한 여러 작품을 보며 참고하지는 않았는지.
=EBS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EIDF) 상영작에서 많이 참고했다.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소재로 한 에바 웨버 감독의 <철로 만든 집>(2008)은 인물을 거의 다루지 않아 이렇게도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고, 토마스 글리슨 감독의 <홈>(2012)은 대사가 한마디도 안 나온다. 텅 빈 공간 위주로 다루는 연출 방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니콜라우스 가이어할터 감독의 <호모 사피엔스>(2016)는 인간이 더이상 살 수 없거나 살지 못하는 전세계의 다양한 공간과 그곳의 음향만을 담아내는 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둔촌주공아파트 주변 곳곳의 소음을 <집의 시간들>에 좋은 퀄리티로 담지 못해 아쉽다.
-<집의 시간들>은 아파트라는 공간을 투기 대상이나 자본으로 보지 않고 공간의 생김새 자체에 집중한 작품이지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다루지 않아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도 있었을 것 같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배가 아팠다는 의견도 있었다. 재건축되니 등장한 집의 가족들은 모두 돈 버는 사람들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등장한 분들 대부분 자가 소유주가 아니었고, 인규씨도 재건축에 따른 이득이 없다. 영화와 관련한 네이버의 베스트 댓글도 그런 지적을 하는 반응이었다. 관객이 이 영화를 두고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 어쩌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도 연결되는 것 같다. 인규씨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만약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 아니라 <안녕, 압구정현대아파트>였다면 이 정도로 공감받지 못했을 거라고. 집은 좋아도 말을 못하고 나빠도 말을 못하는 사회적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결국 끝이 없는 불행배틀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집을 얻기 어려운 현실이니까 나타나는 반응이지만 나는 집이라는 공간은 돈으로 환산하기보다 살아가는 공간으로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반응이 오히려 이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 또 어떤 공간에 관심을 둘지 궁금하다. 차기작을 구상 중인가.
=우연히 어느 장손 집안의 묘지 이장 작업을 찍게 됐다. 그 묘지가 최근에 고속도로 개통 문제로 이장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집안 손녀가 연락을 해 한번 찍어보지 않겠냐고 해서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무덤은 300여년이나 됐는데 이장 과정이 세대마다 다른 풍경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도 날 것 같다. 지난해 여름 촬영을 끝냈고 영상을 보면서 정리 중이다.
● Review_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재건축을 앞두고 철거 예정이었던 서울 둔촌주공아파트를 찾아가 주민들의 집을 직접 촬영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집에 얽힌 사연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흔히 한국의 집과 아파트라고 하면 재화 가치를 최우선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 영화는 살아온 그 축적된 시간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집이 어떤 가구 배치와 어떤 인테리어 소품을 들였는지는 카메라에 담기지만 그곳에 거주한 사람들의 생김새나 직업, 재정 상황 등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공간 자체의 삶이 어떻게 다듬어져왔는지를 들여다보는데 신기하게도 공간이 이미 그 사람의 형태를 닮고 있기에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집의 시간들’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시간들’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독립출판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저자 이인규씨와 함께 기획했다. 책과 영화의 콜라보는 두 사람에게 의외로 생산적인 경험을 안겨줬는데 촬영을 위해 취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여러 정보 중 편집에서 빠진 주민들의 개인적인 내용 등은 책에 옮김으로써 영화는 공간 자체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 추천평_ 김성훈 투기나 투자가 아닌 주거지로서 바라본 아파트 ★★★★ / 이주현 따뜻하고 뜻깊은 가정방문 ★★★☆ / 이화정 사라지는 집을 통해서 본, 가치의 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