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눈물도, 억지 미담도 없다. <엄마의 공책>은 시간강사 아들 규현(이종혁)이 어머니 애란(이주실)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고, 그러면서 어머니의 부재를 하나둘씩 실감하는 과정을 담은 가족영화다. 전작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014, 이하 <개훔방>)이 그랬듯이 이 영화 또한 감동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이야기를 담백하게 끌고 간다. 김성호 감독은 히든 픽처스가 “창작자의 수익 구조 개선에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전작에 이어 또 가족영화다.
=이은경 영화사 조아 대표로부터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베리어프리영화위원회 대표였던 그와 함께 <마이 백 페이지>(2011), <개훔방> 등 여러 영화들을 베리어프리 버전으로 제작한 바 있다. 평소 그는 치매와 그에 따른 문제를 공유, 해결하려는 공동체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저예산 영화로 제작하고 싶어 했다. 이 대표가 김민숙 작가(<헨젤과 그레텔> <호로비츠를 위하여> 등)가 쓴 시나리오 초고를 보여주더라.
-이후 어떤 방향으로 풀고 싶었나.
=감동을 목표로 한 기획영화처럼 보이는 것을 경계하고 싶었다. TV 단막극에서 다뤄도 충분한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각색이 필요했다. 개인적인 경험담을 보태 서사를 영화적으로 풀려고 한 것도 그래서다.
-개인적인 경험담이라면.
=영화 같은 치매 환자를 겪어본 적은 없다. 원래 시나리오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그를 지켜보는 며느리의 사연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며느리를 갈등의 한축으로 삼으면 이야기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부양하는 게 불편하면 그 의견을 존중해야지 부양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그린 이야기로 수정한 것도 그래서다. 어머니의 과거, 어머니가 만든 음식, 형제 관계 등 영화 속 여러 일화들은 개인적인 사연을 반영해 만들었다. 치매는 자료를 조사하거나 치매 환자를 둔 가족들을 인터뷰하면서 공부했다.
-반찬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 애란은 배우 이주실이 맡았는데.
=생활력이 강하고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필요했는데 이주실 선생님만 한 배우가 없었다. 이주실 선생님은 최근 몇년 동안 몸이 안 좋으셨는데도 영화를 작업하고 싶어 했고, 시나리오를 읽고는 욕심을 내셨다.
-시간강사인 규현과 그의 아내 수진(김성은)이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고 걱정하는 동시에 부양해야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꽤 현실적으로 묘사됐다.
=자식에게 치매에 걸린 부모의 부양을 강요하거나 부양을 단순한 미덕으로 다루고 싶진 않았다. 치매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인 까닭에 치매를 막장 드라마나 신파의 소재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할 법한 고민을 그려낸 것도 그래서다. 특히 아내는 아내대로 육아, 일 같은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 상황에 맞게 현실적으로 묘사하려고 했다. 김성은 배우가 결혼, 육아 경험이 있어 아이디어를 많이 내주었다.
-동치미 국수, 주먹밥, 죽 등 영화 속 애란이 만든 요리를 보니 군침이 돌더라.
=원래 영화 제목을 <엄마의 공책, 기억의 레시피>라고 지었는데 나중에 ‘기억의 레시피’를 뺐다. 어머니의 치매와 그로 인한 어머니의 부재를 그리는 서사인데 그것만 다루면 영화가 심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가기 위해 어머니의 요리와 음식을 서사에 추가했다.
-치매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는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준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치매와 관련된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고 공부했다. 특히 일본에서 나온 치매 자료들을 보면서 깜짝 놀란 건 치매를 치료하고 환자를 돌보는 사회적 시스템이 잘 구축됐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서 돌보듯이 치매 환자들을 돌보는 공동체가 마을마다 갖춰져 있었다. 우리나라는 치매 환자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것 말고는 마땅한 돌봄 시스템이 전무한 게 현실이다.
-최근 저예산 영화 시장이 무너진 상황인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저예산 영화와 옴니버스영화를 주로 만들기 때문에 돌파구를 마련할 방법을 계속 찾고 있는데, 관객에게 저예산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나 상영할 플랫폼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지 않다보니 손익분기점조차 넘기기가 쉽지 않다. 저예산 영화나 작은 영화의 강점은 주류에서 못하는 시도를 과감하게 할 수 있다는 건데, 이조차도 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히든 픽처스가 이런 산업 상황에서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IPTV를 포함한 2차 부가판권시장이 갈수록 성장하는 건 환영할 만 하지만 창작자로서 수익의 일부를 배분받을 수 없는 건 여전히 아쉽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창작자에게 충분한 보상이 들어갈 수 있는 안전장치를 고민해주었으면 좋겠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네이버 인기 웹툰인 <쓸개>를 각색해 현재 배우 캐스팅을 하고 있다. 주인공이 엄마를 찾아가는 내용의 액션물이다.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이야기 내용이 세다. 올해 하반기 촬영이 목표다.
● Review_ 애란(이주실)은 30년째 반찬 가게를 해왔다. 음식 솜씨가 훌륭하고 유기농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 내놓는 덕분에 단골 손님이 꽤 된다. 대학 교수가 되고 싶은 시간강사 아들 규현(이종혁)도 그의 음식을 즐겨찾는 사람 중 하나다. 술에 취하면 집에 들어가는 대신 어머니인 애란의 집에 들러 동치미 국수를 해장 삼아 먹고 잠이 든다. 어느 날 애란이 치매에 걸린다. 반찬 레시피를 잊어버리지 않나, 규현에게 춘천으로 데려가달라고 말하고선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왜 이곳에 왔는지 기억을 하질 못한다. 규현은 어머니의 반찬 가게를 부동산에 내놓으면 대학교수가 될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갈등한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과거사와 음식 레시피가 적힌 공책이 드러난다. 엄마의 레시피나 치매가 특별한 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김성호 감독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그를 두고 갈등하는 아들 내외의 고민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화려하진 않지만 담백하고 고소한 애란의 요리처럼 말이다.
● 추천평_ 김성훈 자극적이지 않는 엄마표 동치미 국수 같은 맛 ★★★ / 주성철 치매라는 소재를 사건이 아닌 일상으로 끌어안는 미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