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화는 그렇게 문턱이 높은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생의 비밀이나 가족 사이의 갈등 같은 자극적 요소도 있다. 이런 다양성영화를 접하지 않은 어르신 관객 중에는 따귀 때리는 장면 하나쯤 나올 줄 알았다는 분도 계셨다. (웃음)” 이동은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접했다는 반응처럼, <당신의 부탁>은 출생의 비밀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막장 홈드라마의 단골 소재를 오히려 징글징글하고 끈적끈적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영화다. <환절기>(2018)에 이은 이동은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30대 여자 효진(임수정)이 죽은 남편이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함께 살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당신의 부탁>에 관객 2만5천여명이 들었다. 최근의 독립영화 스코어를 생각하면 적지 않은 수지만 감독으로선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지난해 1만명 이상의 관객이 든 한국 독립영화가 많지 않기 때문에 독립예술영화 관계자들은 관객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신의 부탁>을 임수정 배우가 출연한 상업영화로 보는 분들은 너무 적게 들어 아쉽다고 한다. 개봉 1주차 주말보다 2주차 주말에 관객이 더 들었지만 2주차에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하는 바람에 버텨내기 힘들었다. (웃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97%의 예매율을 기록한 상황에서 <당신의 부탁>은 물론이고 다른 영화들은 상영관을 잡기조차 힘들었다. 그때는 무력감을 느꼈다.
-<환절기> <당신의 부탁> 모두 직접 쓴 그래픽노블을 영화화했다. 영화와 그래픽노블 작업을 병행하는 것의 재미는 무엇인가.
=<당신의 부탁>은 <당부>라는 제목의 시나리오가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정이용 작가가 그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보겠다고 해서 책으로 나오게 된 경우다. 시나리오를 쓸 땐 머릿속에 나만의 영화적 인물과 공간이 들어서고, 만화 작업을 할 땐 정이용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그림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작품이 남게 되고, 영화로 만들어지면 배우들을 만나 각색된 작품이 남게 된다. 그래서 <당신의 부탁>이라는 작품이 내게는 세개의 세계로 존재한다. 각각의 세계가 모두 달라서 재미있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효진이 죽은 남편의 전부인이 낳은 16살짜리 아들과 살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최초 모티브가 궁금하다.
=장례식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장례식장에서 애도의 크기를 평가할 때가 있지 않나. 많이 울면 ‘상실의 아픔이 크구나’ 하면서 다독여주고, 슬픔을 적게 표현하면 ‘왜 안 슬퍼하지?’ 혹은 ‘잘 이겨내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고. 우리는 왜 타인의 애도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 평가하나 싶었다. 그리고 그건 주어진 역할 때문이겠구나, 그러면 가족 내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러면서 시작된 이야기다.
-가족의 서사 중에서도 엄마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모성에 먼저 집중한 건 아니고, 언급한 것처럼 엄마라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고, 누구나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별을 떠나서, 나이를 떠나서. 그렇다고 엄마는 위대하다거나 엄마가 돼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에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 걸 얘기하는 분도 계신데, 적어도 내 세대에 국한해 말하자면 부성은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사회가 거대한 가부장제라 생각했고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왜 아버지가 책임져야 할 것을 여성들이 책임져야 하냐고 묻기도 했지만. (웃음)
-임수정, 김선영, 이상희, 서신애, 윤찬영, 김민재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배우들이 좋은 앙상블을 보여준다. 캐스팅할 때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캐스팅 과정에서 배우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대단한 개런티를 주는 것도 아니고, 유망한 감독이라 영화제 레드카펫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오로지 시나리오를 통해서 마음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상투적 표현 같지만 정말 운이 좋았다. 임수정 배우를 비롯해 대부분의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맘에 들어했다. 캐스팅할 때는 배우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찾아본다.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생기고, 어떤 결을 가진 사람일까 궁금해지고, 내가 생각한 캐릭터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겠다 싶으면 작업을 제안한다.
-<환절기> <당신의 부탁> 모두 서울이 아닌 중소 도시가 배경이다.
=서울과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데, 그 말은 곧 나머지 절반은 비수도권에 살고 있다는 얘기다. <당신의 부탁>은 청주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조금은 천천히 사는 사람들이라서 이들의 정서나 삶의 속도가 서울과는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소재로 한 세 번째 영화 <니나 내나> 촬영을 이미 마쳤다. <니나 내나>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2015년에 <요요>라는 시나리오를 썼다. 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정이용 작가가 2년 동안 그림 작업을 했는데, 그 결과물이 곧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사랑의 블랙홀>(1993)과 비슷한 타임루프물이고, 여자와 남자의 하루가 반복되는 이야기다. <요요>를 영화화할 계획까지 세운 건 아니다.
● Review_ 효진(임수정)은 2년 전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다. 몸과 마음의 병을 짊어진 채 친구 미란(이상희)과 공부방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효진은 죽은 남편의 전부인이 낳은 16살 아들 종욱(윤찬영)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는 걸 알고는 종욱의 보호자가 되기로 한다. 한편 종욱은 자신의 친엄마가 살아 있다 믿으며 친구 주미(서신애)와 엄마를 찾으러 다닌다. <당신의 부탁>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경험한 효진과 종욱이 덜컥 가족이 되어 상처를 치유하고 함께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다. 종욱을 버리고 제 살 길을 찾아간 엄마 연화(김선영), 10대에 덜컥 임신하곤 자신의 아이를 더 좋은 가정에 입양시킬 생각을 하는 주미 등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모성이 효진과 종욱의 서사를 촘촘하게 엮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확장하는 이야기이며, 따스한 포용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 추천평_ 김혜리 서로의 부탁을 들어주는 이들로 지탱되는 오붓한 세상 ★★★ / 박평식 발목을 잡은 삽화 하나 ★★☆ / 이주현 자극적 설정과 포용의 시선이 결합된 독특한 홈드라마 ★★★ / 장영엽 각자의 생채기를 안고 나란히 걷는다는 것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