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히든픽처스] <나비잠> 정재은 감독 - 죽음 앞에 선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2019-04-12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사랑이 떠나간 뒤 남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2018년 9월 개봉한 정재은 감독의 한·일 합작영화 <나비잠>은 다소 진부해 보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물음표로 남아 있는 질문을 탐구한다. 유전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삶을 정리하는 소설가 료코(나카야마 미호)와 소설가를 꿈꾸는 한국인 유학생 찬해(김재욱)가 사랑에 빠진다.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감정은 녹음 짙은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료코의 소설 <한여름의 연회>처럼 농염하고 뜨겁지만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도 점점 변해간다. <말하는 건축가>(2012), <말하는 건축 시티:홀>(2013), <아파트 생태계>(2017) 등의 건축 다큐멘터리를 경유해 12년 만에 당도한 정재은 감독의 극영화는 관계의 생성과 소멸, 인물에 공명하는 공간을 감각적인 영상과 정교하게 구축된 서사를 통해 구현한다.

-<나비잠>의 주인공 료코는 소설가다. 그는 “내가 느낀 강한 감정, 그것이 이야기의 근원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을 준비하며 이야기의 근원이 된 감정이 있다면.

=사랑했던 두 사람이 이별한 뒤 느끼는 감정을 다뤄보고 싶었다. 대개 사람들은 이별 뒤 상대방이 자신에게 더이상 감정을 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젊은 주인공이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감정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소설가가 주인공이지만,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비극적으로 풀어낸 여타 멜로영화와 달리 <나비잠>은 삶의 말미에 찾아온 우연과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주인공 료코는 유전성 알츠하이머라는 극단적인 병을 앓고 있지만, 자의식이 소멸되어가는 과정에서 죽음을 마주하며 자의식을 벗어나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여성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경우 보통 크게 좌절하지만 그와 달리 준비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료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에서 많이 느끼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외면하고, 자신은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료코를 연기한 주연배우 나카야마 미호와 한국인 유학생 찬해를 맡은 김재욱이 풍경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더라.

=두 사람을 따로 만나다가 의상를 논의하는 미팅 자리에서 처음 같이 봤는데, 둘이 남매처럼 닮았더라. 케미스트리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나카야마 미호라는 아름답고 강한 인상을 가진 배우와, 일본에 매니저도 없이 혼자 와서 일본어로 연기하는 한국 배우 김재욱의 상황이 영화 속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 같다.

-기억을 잃어가는 료코의 서재가 찬해에 의해 시각적으로 재분류되는 장면이 근사하다.

=문학에 대한, 책에 대한 자조를 담아 구현한 장면이다. 사람들에게 더이상 책은 의미가 없고 장식용이라는 걸 소설가 자신이 인정하는 순간이니까. 료코의 서재가 위치한 집을 헌팅하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 대부분의 장면이 집 안에서 진행되고, 소설가인 료코와 그를 돕는 찬해가 작업을 이어가고 글을 써가는 과정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서민형 주택보다는 시간의 흐름이 공간 안에 담겨 있는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베 쓰토무라는 건축가가 흔쾌히 협조해줬다.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던 분이라 자신의 집을 한국 영화감독이 어떻게 찍을지 궁금하다며 대여해줬다.

-최근 다큐멘터리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편집하고 있다고.

=재건축을 앞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배경이다. 사람을 비롯해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그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고양이들은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떻게 되는지를 다룬 이야기다. 올가을에 완성하는 게 목표다.

-평소 영화의 제작 방식과 유통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창작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극장 중심의 극영화 시장에 한계를 많이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역할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그래서 <아파트 생태계>의 경우, 극장 배급을 아예 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고, <고양이들의 아파트> 또한 유튜브, 비메오 등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로 공개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대부분의 영화가 극장을 1순위로 배급하고 IPTV로 넘어가는 단계를 거치는데 이런 관행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극장 배급과 마케팅에 큰 비용을 들였는데, 극장에서 상영하는 기간은 말도 안 되게 짧을 때가 많다. 거기에 투자하기보다 어떤 영화는 다른 배급 방식을 고민하는 데 비용을 더 쓰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고 보는 거다. 영화감독이라는 정체성 이상으로 좀더 치열하게, 넓게 고민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현재의 필름메이커가 아닐까 생각한다.

● Review_ 료코(나카야마 미호)는 일본의 유명 소설가다. 유전성 알츠하이머에 걸린 그는 언어와 기억을 잃어간다. 좌절하며 고통 속에 머물러 있기보다 담담하고 초연하게 자신의 신변을 정리해가는 료코는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 유학생 찬해(김재욱)에게 자신의 마지막 작품 <영원의 기억>의 집필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료코가 말하고, 찬해가 받아 적는 식으로 소설이 완성되어갈 무렵, 두 사람의 관계도 깊어진다. 하지만 료코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된다. ‘어린아이가 반듯이 누워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을 뜻하는 제목처럼, <나비잠>은 삶의 변곡점에서 두 남녀에게 찾아온 달콤하고 애틋한 순간을 조명하는 멜로영화다. 액자 구조로 삽입된 료코의 소설 <한여름의 연회>의 장면들은 두 남녀의 관계를 우회적으로 암시함으로써 이 영화에 정서적 긴장감과 시각적 충만함을 부여한다. <말하는 건축가> <말하는 건축 시티:홀> 등 건축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창작자답게, 등장인물의 상황과 감정에 공명하는 공간으로 구현된 료코의 집은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 추천평_ 김소미 어른 멜로의 화사한 귀환 ★★★ / 이용철 농밀하다, 떠나보낸 사랑의 기억을 되살릴 정도로 ★★★☆ / 이화정 공간과 함께 태동한, 공감각적 멜로 ★★★ / 장영엽 감정은 기억보다 더 오래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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