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히든픽처스] <소녀의 세계> 안정민 감독 - 독립영화 사람스러움의 발견
2019-01-25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만찢’ 영화라고 하면 딱 맞을까. <소녀의 세계>는 평범한 고등학생 선화(노정의)가 선배 하남(권나라)을 만나면서 겪는 두근두근 알 수 없는 마음의 세계를 그린 영화다. 고교 시절 연극부 부장이었던 안정민 감독이 그때의 순수하고 풋풋한 감정을 새겨두었다가 9년 동안 개발한 작품. SF물 <천사몽>(2000)의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해 그간 <검은집>(2007), <그림자 살인>(2009)의 조감독을 거쳐 만든 데뷔작. 상상력을 극대화한 성장 드라마다.

-히든 픽처스에 선정되고 반응이 좋아졌다고.

=사실 내 친척들조차 이 영화가 개봉한 줄 몰랐다. (웃음) 히든 픽처스의 지원이 이렇게 큰힘이 될 줄 몰랐다. 포털사이트에서 영화 순위 100위권밖에 밀려나 있었는데 히든 픽처스에 선정돼 다시 소개되면서 댓글과 트위터의 트윗이 활성화됐다.

-주인공 선화를 중심으로 한 10대 소녀의 성장물이다. 9년 전부터 개발한 만큼 그간 어려운 고비가 많았을 텐데 끝까지 고집한 것은 무엇이었나.

=투자사들 입장에서는 상업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19세 관람가’ 요소를 요구하더라. 그렇다면 나는 빠지겠다고 했고, 포기하려는 순간 지금의 제작사를 만나게 됐다. 교실의 4분단 끝에서 벽쪽에 앉은 아이. 구석에 있어서 잘 안 보이는 평범한 소녀의 첫사랑을 생각했다. 클리셰일 수도 있는 평범한 드라마지만, 나는 이 이야기 속 소녀가 우주만큼 소중한 존재였으면 했다. 큰 욕심이 아니라 ‘맞아, 나도 그때 여자 선배를 좋아했었어’ 하는 정도로 잠깐 맑은 기분으로 환기해주고 싶었다.

-10대 여학생의 섬세한 감정이 생생하게 표현되는데 어떻게 풀어갔나.

=남고를 다녔는데 연극부여서 인근 학교와 결연해 연극 동아리 회원들끼리 만났다. 연극 연습을 하면서 각 학교의 여학생들이 학교로 와서 방학 내내 같이 연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고, 이 학생들을 응원하러 온 다른 여학생들도 알게 됐다. 수능이 코앞인 시점에서도 연극을 매개로 순수하게 즐겼던 것 같다. (웃음) ‘소년’이었던 내가 바라본 첫사랑에 대한 시점이다보니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든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를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10대 시절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연극부 활동 경험이 영화의 구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준비하면서 연극의 상황을 빗대어 세 여학생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 변화를 표현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장 대중적인 희곡이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그 이야기들을 한번 접목해보자 했다. 물론 세 소녀가 가지는 감정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감정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나 옛날 문어체의 대사로 현실과 무리 없이 접목하는 부분이 어려웠다.

-우주로 날아가는 것 같은, 선화의 판타지 장면이 조악하지만 재밌다. 독립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아기자기한 CG 장면을 삽입해 경쾌한 느낌을 전달한다.

=독립영화 하면 사회문제를 다루는 작품이 대다수고, 그만큼 어두운 작품이 많아 반감이 있어서 좀 색다른 걸 보여주고 싶었다. 또 영화의 호흡이 다소 긴 편이라 그 사이의 브리지로 선화의 상상 신을 배치했다.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환기인데 거기에 재미를 주고 싶었다. 프롤로그의 우주 장면 같은 경우, 눈높이는 할리우드영화 <마션>(2015)처럼 분화구를 만들고 와이어도 쓰고 제대로 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아주 싼 우주복을 썼다. (웃음) 적은 예산으로도 관객이 지루해 하지 않을 장면을 만들어 재미를 주고 싶었다.

-캐릭터에 딱 맞는 배우의 발견이라는 점도 주목을 끈다.

=캐스팅은 내가 생각해도 잘한 것 같다. (웃음) 선화 역의 노정의 배우가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하남 역을 맡은 (권)나라 배우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의 이영진 배우를 떠올리게 한다. 이영진 배우는 당시 첫 작품인데 ‘저 역할은 저 친구밖에 못해’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나. 세간에서 평가하는 중성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역할 그 자체 같은 느낌이다. 선화 역은 경쟁이 치열했는데, 수연 역의 조수향 배우는 크랭크인 열흘 남기고 캐스팅해서 그때부터 촬영 전까지 매일 쉬지 않고 연습을 했다.

-결말이 지나치게 보편적인 정서로 끝난 데 대해, 오히려 ‘백합물’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반응도 많았다.

=결론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다. (웃음) 사실 백합물을 전혀 모르고, 나는 첫사랑 자체에 중점을 두고 그렸다. 모든 인물은 첫사랑을 가지고 있고, 일반적으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지 않나. 속편을 만들 생각도 했었다. 지금은 선화가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바라보는 시점은 감독인 나와 수연이라 생각했다. 수연의 관점, 하남의 시점을 반영한 드라마도 만들어보고 싶다.

-차기작 계획은.

=늘 준비 중이다. 지금은 어머니와 아들의 생활 스릴러를 써서 각색 중이다. 한국적 모성애가 없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또 한편은 결혼 문제에 얽힌 범죄코미디도 구상 중이다. 무거운 주제를 좀 가볍게 풀고 싶고, 어떤 방법이 있는지 찾고 싶다. 지금은 그 과정에 있다.

● Review_ 고등학교 1학년 선화(노정의). 학교에서도 평범하고 존재감 없는 그녀에게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연극반 선배 수연(조수향)이 곧 발표될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으로 선화를 지명한 것이다. 선화는 연기에 재능도 취미도 없어 거절하려고 하지만 연극반 선배이자 전교생의 우상인 하남(권나라)을 보고 마음이 바뀐다. 선화는 등장부터 만화책을 찢고 나온 듯 멋있는 하남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선화를 둘러싼 수연과 하남, 셋 사이의 미묘하고 팽팽한 삼각관계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습 기간 내내 펼쳐진다. 하남이 건넨 눈빛은 별거일까, 별거 아닌 걸까. 동성애일까 아닐까. 하남을 만난 날부터 선화의 마음은 내내 헷갈리고 조마조마하고 두근두근하다. <소녀의 세계>는 선화의 내적 갈등을 그린 성장담이다. 하남이 건넨 말 한마디, 하남과 같이 탄 자전거. 어느 하나 선화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노정의, 권나라, 조수향 세 배우의 연기가 미묘한 감정의 결을 풋풋하게 완성해준다.

● 추천평_ 이화정 17살 여름, 그때의 일기장을 펼쳐 들다 ★★☆ / 임수연 시와 낭만을 믿는 예쁜 백합물. 오글거려도 귀여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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