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디테일이다.” 장률 감독은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 담긴 여러 요소, 이를테면 캐릭터의 성격이나 자주 쓰는 대사나 건물의 디자인 같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것이 자신이 평소 생각하고 고민한 것을 반영한 거라고 이야기한다. 개봉 시기에 많은 경로를 통해 영화의 이모저모를 이미 접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영화에 담긴 사소한 것들에 대해 물었다.
-이야기를 처음 구상할 때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 목포를 배경으로 정했다가 여건상 군산으로 바꾸면서 영화의 방향도 일정 부분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장소를 먼저 떠올리고 그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입장에서는 색다른 시도였을 것 같다.
=내 영화의 이야기는 공간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목포에 다녀온 뒤로 줄곧 그곳이 생각났다. 마치 식민지 시절의 옛 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럼 거기 가서 찍어야 하지 않겠나. 목포에서 꼭 찍고 싶은 건물이 문화재라서 촬영이 금지된 곳이었다. 하는 수 없이 군산에 갔는데 일본식 건물이 더 많은 거다. (웃음) 잘됐다 싶었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살았던 만주는 일상과 역사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물론 사람들은 지금도 3·1절을 기념하거나 독립운동가를 기리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경험은 아니다. 나는 한국에 오면 늘 역사를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공간을 생각했다.
-영화에 담긴 군산 풍경이 지금의 관광지다운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아 인상적이다. 대중적인 지역색을 지우려고 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건물을 재현해놓은 풍경보다도 일상의 사람들에 집중하며 공간을 골랐다. 관광지로 인식되곤 하는 은행이나 관공서 건물은 오히려 카메라에 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관광은 일상이 아니니까.
-영화는 시간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앞뒤가 바뀌어 있다. 관객은 처음에 송현(문소리)과 윤영(박해일)이 서울에서 처한 상황을 모른 채로 영화를 보다가 뒤늦게 두 사람이 군산에 내려오기 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알게 된다.
=실제 우리 삶을 기억하는 그대로 찍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기억은 역사책처럼 순서대로 나열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을 더듬으려 할 때 역사책처럼 순서대로 찾아나가면 오히려 더 왜곡될 우려가 있다. 실제 많은 역사책이 그래서 왜곡되기도 했고.
-배우 박해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는 묘하게 <경주>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인물들이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끝내는 엔딩도 앵글만 다를 뿐 흡사하다. 애초에 기획할 때 두 영화, 혹은 두 장소의 연관성 같은 걸 고민했나.
=비슷하다면 그 책임은 박해일이 져야 할 거다. (웃음) 두 영화에서 해당 장소로 향하는 인물의 동기도 다르다. 그나저나 두 영화의 엔딩이 닮아 있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됐다. 감독의 감정이라는 게 어디 가겠나.
-극중 윤영은 왜 그렇게 기시감을 자주 느끼는 걸까, 의아했다. 어디를 가도 와본 곳 같다고 하고, 누구를 만나도 자꾸만 본 적 있느냐고 묻는다.
=나이가 들수록 영화에 내가 겪어본 일과 생각이 많이 담긴다. 윤영이 시를 쓰고 좋아하지 않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시인들에게서 유독 그런 면모가 느껴지는데 시라는 게 순서와 상관없다. 그들은 시공간을 시간 순서대로 사고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섞여 사는 것 같다. 내가 겪은 시인 대부분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에 초청됐던 차기작 <후쿠오카>는 과거의 절친한 친구이던 두 남자가 우연히 후쿠오카에서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신 곳이 후쿠오카이기도 하다. 두 작품 사이의 연관성이 있는 설정은 아닌지.
=박소담 배우도 두 영화에 모두 출연했으니까 사람들은 두 영화가 관계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영화다. 지난 10여년간 내가 후쿠오카를 다니면서 느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텐데, 또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올해 하반기 쯤 개봉할 예정이다. 그때도 히든 픽처스가 지원해주면 좋겠다.
● Review_ 송현(문소리)과 윤영(박해일)이 군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도착해서 푸짐하게 밑반찬을 차려주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손님을 가려 받는 깐깐한 부녀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짐을 푼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연인일까 혹은 여행지 외에 다른 곳에서 만나서는 안 되는 사이일까. 관객은 이에 대해 전혀 모른 채 두 사람이 어떤 이유로 군산에 왔고 이후 둘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조금씩 지켜보게 된다. 이들이 군산에 내려오는 상황에서 영화가 시작하고 두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가 2부에 해당하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조다. 그들이 군산에서 만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국숫집 사장이나 민박집 주인 부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까지도 이들이 처한 상황에 미묘하게 영향을 끼친다. 언뜻 보기에는 여행과 사랑에 관해 고민하는 듯하지만 그 배경에는 장률 감독이 평소 자주 하는 역사와 공간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 묻어 있는 작품이다.
● 추천평_ 김현수 일상이 섞여 만들어내는 역사의 기록 ★★★☆ / 박평식 유머부터 즐기고 의미는 천천히 ★★★☆ / 이용철 왜 거위인지는 모르겠으나… ★★★☆ / 이화정 현재를 걷는데, 과거가 있고, 미래가 보이는 연출 ★★★☆ / 허남웅 연애를 우회해 시간을 거슬러 가면 만나는 혼재의 역사 ★★★☆